성경의 역사 중에 가장 고통스럽고 쓰라린 역사를 꼽는다면 아마도 바벨론이라는 거대 제국에 의하여 이스라엘 남 유다의 수도인 예루살렘성이 함락되는 사건일 것이다.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의 군대는 B.C.588년 1월에 예루살렘 성을 에워쌓았다. 그리고 B.C. 586년 7월까지 포위 공격은 계속되었다. 고대 전쟁에 있어서 자주 사용되었던 성을 에워싸는 포위공격은 한마디로 성 안에 있는 군대와 사람들의 먹을 것 마실 것을 차단하여 철저하게 고사 시키는 작전이었다. 이 기간 동안 예루살렘성 안에서도 생각조차 하기 힘든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극한 굶주림에 시달린 부모들이 기아로 인해 죽은 자기 자녀들을 삶아 먹는 끔찍한 장면이 연출 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예루살렘성은 거의 일 년 반 동안의 포위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함락된다. 성은 불타고 성 안에 있던 웅장한 솔로몬 성전은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남 유다 사람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70년간의 노예 생활을 해야만 했다.
이 처럼 너무나도 쓰라린 조국의 폐망의 현장을 두 눈 똑바로 뜨고 바라본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예레미야 선지자’이다. 그리고 그가 이 처참한 망국의 현실을 애가로 지어 부른 성경이 소위 ‘예레미야 애가’이다. 그는 이 애가를 통해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한다.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오나”(3:19) 이것은 절망에 가까운 탄식이었다. 폐망의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방백들의 미움을 받아 토굴에 갇히고 진흙 구덩이 속에 던져져야 했던 자신의 고초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예루살렘성의 재난의 현실은 그의 고백 그대로 쓰디쓴 쑥이요 담즙이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이런 상황 속에서도 소망을 노래한다. 그의 소망의 노래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 “중심에 회상한 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3:21) 그는 이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중심 깊숙한 곳에서 소망의 불을 꺼뜨리지 않고 있었다. 예레미야가 중심에 회상한 소망의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그가 믿는 하나님이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고초와 재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여 진멸되지 않는다.”(3:22)라고 고백한다. 이 말을 바꾸면 하나님께서 인생들을 향한 자비와 긍휼의 손길을 한 순간 거두시면 우리는 진멸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를 향한 그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손길이 무궁하다고 믿는 사람은 어떤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도 소망을 노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아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아니하고 이 사실을 날마다 확인한다고 고백한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3:23) 여기서 “이것”은 곧 그의 소망의 노래의 근거가 되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다. “아침마다 새로우니!” 왜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울까? 아침은 잠에서 깨어나는 시간이다. 성경에서 잠은 죽음과 연결시킨다. 예수님께서도 죽은 나사로를 살리려 가시면서 제자들에게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내가 깨우러 가노라.”(요한복음 11:11)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죽음이란 영원히 잠들어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하룻밤 잠든 시간이 영원히 지속되지 아니하고 눈을 떠 내가 다시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시간, 오늘 하루도 하나님께서 자비와 긍휼의 손길로 나를 깨워 주셨음을 확인하는 시간이 곧 아침이라는 것이다. 아침에 눈을 뜨며 이 사실에 대해 감격하며 감사하며 감동할 수 있는 사람이 소망을 노래할 수 있는 사람이다.
과학자들이 캄캄한 독 속에 뒤를 집어넣고 실험을 했는데 5분이 못되어 죽었다고 한다. 그런데 독 속에 한 가닥 빛을 비췄더니 쥐들이 55시간을 살아 있더라는 것이다. 이 실험 결과로 과학자들이 이런 결론을 내렸다. 캄캄한 독 속에서 5분을 견디지 못하고 죽은 쥐들은 체력이 다해서 죽은 것이 아니라 절망하여 죽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철학자 키엘키고르는 절망은 곧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다. O.S.마스든은 “소망을 갖고 사는 사람은 사람들이 실패를 보는 곳에서 성공을 보고, 그늘과 폭풍을 보는 곳에서 햇빛을 볼 줄 아는 사람이다”라고 했다. 오늘도 눈에 보이는 힘들고 지친 이민 생활의 현실만 바라보며 절망을 노래하지 말고 아침마다 새로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무궁하심에 감동하여 소망을 노래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자, 이제 우리 모두 이렇게 노해하자! “오늘도 나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과 긍휼이 무궁하기 때문에 오히려 나는 소망이 있습니다. 이것이 나에게는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새롭고 감격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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