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은 맞은 큰 아이는 요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신나게 놀아야 하는 여름방학임에도 불구하고 극성맞은 엄마를 만난 탓에 매일 밤 눈물을 흘리면서 잠자리에 든다. 이유는 한글로 써야하는 ‘한줄 일기’ 때문이다. 필자는 여름방학이 시작된 다음날부터 지금까지 한달 여 동안 큰 아이에게 한줄 일기를 시키고 있다. 달랑 한 줄만 쓰는 일기지만 틀린 글자가 대부분이다. 날씨를 쓰는 부분에서도 맑음을 ‘말금’으로, 먹었다를 ‘머겄다’라고 쓰는 건 애교 수준이다. 맛있었다를 ‘맛있서다’로 쓴다. 버럭 소리를 지르자 잠시 망설이다 맛에 ㅅ을 추가해 ‘맜있서다’로 고친다. 그러니 복장이 터지고, 손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급기야 우리 아이가 천재가 아님을 깨닫곤 한다.

    2년 전만 해도 아들 녀석이 한국말을 할 때면 신기했다.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어차피’, ‘이래도 저래도’라는 소위 어른용 단어를 종종 사용했었다. 일하는 엄마라는 핑계로 한국 동화책 한권 제대로 읽어 주지 못했지만, 아이는 아랫집 할머니와 단둘이서 한 시간 정도의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한국말에 능숙했다. 당시에는 한국말을 너무 잘해서 오히려 학교를 갈 때가 되니 영어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영어 공부를 좀 시킬 것을 잘못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선생님이 물어보는 것에 대답하지 못하면 어쩌나, 화장실을 제때 갈 수 있으려나, 친구와 싸웠는데 영어를 못한다는 이유로 잘못을 뒤집어쓰면 어쩌나, 숙제는 제대로 알아듣고 오는 것일까 등의 이런저런 걱정들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러던 아들이 3년 이상 학교를 다니면서 이제 영어가 입에 붙었다. Hungry, Thirsty, Poo 이 세가지 단어만 일주일 동안 열심히 연습해서 유치원에 입학했던 아이가 이제는 영어로만 대화를 하고 있다.

    솔직히 말하면 그동안 주변에서 한국말을 못하는 한인 자녀들을 보며, ‘어쩜 저렇게 한국말을 못하지’하는 약간의 비아냥거림도 가졌었다. 한국인의 뿌리를 가진 자녀가 한국말을 잊어버리고 살고 있다는 것에, 그 사실을 알고도 내버려두는 부모들이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적어도 내 아이들만큼은 한국말을 못하도록 내버려 두진 않을 것’이라는 자만심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뒷통수를 크게 얻어 맞은 듯한 사건이 발생했다. 큰 아이가 얘기하는 것을 정확히 알아듣지 못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한국말과 영어를 섞어가면서 학교에서 친구와 싸웠던 얘기를 하고 있는데, 누가 잘못을 했는지, 우리 아이가 어떻게 대처를 했는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분명 주어는 하나인데, 동사가 두 개이고, 문장 중간중간에 더듬거리며 말을 이어가는 ‘어, 어…’하는 불필요한 단어들이 쏟아지면서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아들은 “다시 말해보라”는 엄마의 거듭된 요구에 따라 자신의 생각을 한국어로 정리하려고 시도했지만, 결국 ‘영어로 설명하면 안되냐’고 물었다. 이때처럼 황당했을 때가 없었던 것 같다. 지난 4년 동안 매주 토요일마다 한국학교를 다녔고, 집에서도 항상 한국말을 사용했고, 한국의 친척들과 매일같이 한국말로 전화통화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영어가 훨씬 편하다고 하는 것일까. 우리 아들만큼은 한국말을 계속 잘할 것이라는 근거없는 필자의 자신감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갑자기 아이와 진실된 대화를 할 수 없는 날이 곧 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걱정보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가족이라는 테두리에 형식적으로 다리 하나만 걸치고 있을 모습을 생각하니 마음이 더욱 바빠졌다.

    물론 남편과 나는 한국말이 훨씬 편하다. 우리가 영어를 아이들만큼 배워서 잘 할 자신이 없기에, 아들에게 한국말을 더 열심히 가르쳐주는 편이 우리의 노후를 위해서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한 줄 일기’ 여름방학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그래서 여름 방학이 시작된 지 한 달이 되어 가지만 이번 방학에는 영어 공부를 별도로 시키지 않았다. 아들은 저녁을 먹고 10분 동안 한국 동화책을 읽고, 잠자기 30분전에는 한 줄 일기를 써야 한다. 월, 일, 요일, 날씨 순으로 시작되는 한 줄 일기는 아주 간단하게 한 문장만 적으면 된다. ‘오늘 점심은 라면과 볶음밥이었다, 오늘은 전화기를 잃어버렸다,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았다’ 등의 내용이다. 물론 이 작업은 필자의 강요에 의한 것이지, 아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이번 주부터 남은 방학기간에는 존칭에 관한 단어를 집중적으로 가르칠 생각이다. 위아래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You라는 영어식 호칭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 세운 계획이다. 적어도 가족과 한인 어르신들에게 사용해야 하는 존칭 정도는 어릴 적부터 알려줘야 할 듯해서 말이다. 어릴 적 능수능란하게 잘하던 한국말이 이 곳 학교를 가면서부터 갑자기 어눌해지는 건 미국에 살면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다. 잠꼬대까지 영어로 하는 걸 보면 말이다.

    한국학교를 보내는 것만으로, 집에서 한국말을 사용하는 것만으로, 내 아들만은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큰 착각이었다. 강압적이라도 부모의 노력이 없다면 결코 발전할 수 없는 것이 타국에서 성장하는 아이들의 한국어 실력임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미국에 살고 있으니 한국말은 잘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내 조국이 한국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으니 이보다 더 한심한 생각은 없다.
 오늘도 필자는 여름밤 아들이 꿈꾸는 악몽의 주인공이 될 듯하다. 밤마다 매의 눈이 되어 책상에 앉아 있는 필자의 눈치를 살피면서 아들은 쭈볏거리며 동화책 한 권을 가지고 온다. 아들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 곧 내 언성도 높아지기 시작한다. ‘이 글자가 아니잖아!”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많은 학부모들도 필자와 함께 이번 여름방학 동안이라도 나쁜 엄마가 되어 주길 바란다. 비록 지금은 엄마가 혼내는 사람으로 각인될지 몰라도, 훗날 값진 선물을 준 것에 감사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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