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불의 여신 정이>는 조선 선조, 광해군 시대의 여성 도자기 기술자를 소재로 한 드라마다. 주인공 정이(문근영 분)는 정상급 기술자인 이강천(전광렬 분)의 딸이지만, 그 사실을 모른 채 이강천의 라이벌인 유을담(이종원 분)의 딸로 성장한다. 처음에는 도자기에 관심이 없었던 정이가 친부의 핏줄과 양부의 교육에 힘입어 점차 기술자로 성장한다는 것이 이 드라마의 줄거리다.
드라마에서 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백파선은 임진왜란(1592~1599) 때 남편인 김태도와 함께 일본에 끌려간 여성 도자기 기술자다. 그의 신상에 관한 정보는 대마도 동남쪽인 규슈섬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규슈섬의 서북쪽인 사가현의 보은사(일본명 호온지)에는 백파선의 법명인 만료묘태도파에서 이름을 딴 만료묘태도파지탑(萬了妙泰道婆之塔)이란 비석이 있다. 백파선이 사망한 지 50년째인 1705년에 증손자인 심해당선(深海棠仙)에 의해 세워진 이 비석에서는 "증조모의 이름은 알 수 없다"고 했다. 이름을 알 수 없다고 했으니, 백파선은 실명이 아닌 것이다.

   그럼 백파선이란 말은 무슨 뜻인가? 비석에서는 "증조모는 얼굴이 온화하고 귀가 축 늘어졌으며 성격이 자애로웠기 때문에, 후손들이 존경하는 마음에서 백파선(百婆仙)이라고 불렀다"고 했다. 이에 따르면 백파선은 칭호에 불과하다. 그의 실명을 모르는 후손들이 그런 칭호를 붙였던 것이다.
그런데 백파선의 비석을 세운 증손자의 이름이 심해당선이다. 증손자의 성씨가 심해(深海)가 된 것은 백파선, 김태도 부부가 조선 심해란 곳에서 왔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심해란 지명은 없었다.
심해의 위치에 관해서는 역사학자 김문길의 견해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는 심해를 경상도 김해로 추정했다. 김태도의 고향인 김해가 심해로 잘못 발음되고, 이것이 일본에서 이 부부의 성씨가 되었다는 것이다. 김문길에 따르면, 김태도는 김해 상동면 대감리 출신이다.
일본으로 건너간 백파선 부부는 처음에는 오늘날의 사가현 다케오시시(市)에 정착하여 도자기를 생산했다. 이곳에서 김태도는 심해종전(深海宗傳)이란 이름으로 불렸다.
임진왜란 종전 19년 뒤인 1618년에 김태도가 사망하자, 백파선은 인근 지역인 오늘날의 사가현 니시마츠우라군(郡) 아리타정(町)으로 이주했다. 당시의 아리타에는 조선인 기술자인 이참평에 의해 이미 도자기 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백파선이 그리로 이주한 것은 그곳 토질이 도자기 생산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백파선은 자기 가족만 데리고 아리타에 간 게 아니다. 노성환의 논문에 인용된 김태준의 논문 '고려 자손들과 일본의 도자 문화'에 따르면, 백파선은 기술자 906명을 거느리고 아리타로 이주했다. 대규모 기술자들이 함께 이주했다는 것은, 이들이 아리타에서 이참평 집단에 흡수되기보다는 별개의 집단을 이루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이참평 못지않게 백파선도 아리타 도자기로 대표되는 일본 도자기의 발전에 기여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만 해도, 전 세계적으로 도자기 하면 중국이 단연 독보적이었다. 도자기는 차, 비단과 더불어 중국의 전통적인 3대 수출품이었다.
중국과 조선에 밀렸던 일본 도자기 산업이 17세기 중반부터 동아시아를 벗어나 세계 시장에 진출한 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16세기 후반의 임진왜란을 틈타 백파선, 김태도, 이참평 같은 조선인들을 끌고 가서 일본 도자기 산업의 초석을 놓은 것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
백파선을 비롯한 조선인들이 일본 도자기에 얼마나 큰 공헌을 했는가는, 백파선이 활동하던 시기인 1645년경부터 일본이 중국제 도자기 수입량을 80%나 줄인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조선인 기술자들 덕분에 일본이 도자기 내수화에 성공했던 것이다.
백파선의 삶은 여성 도자기 기술자의 삶이라서 중요한 게 아니다. 그의 삶은 일본이 한국과 중국을 제치고 세계적 강국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래서 그의 삶은 한국인이 보기에는 상당히 서글픈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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