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구암 허준>은 16세기 조선사회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다. 이 드라마 속의 등장인물들은 허준에게 "어의가 되면 면천을 받을 수 있을 거야"라며 면천에 대한 열망이 특별히 강하게 표출되고 있다.
물론 실제의 허준은 노비가 아니라 양인(자유인)이었다. 그러나 정말 조선시대 노비들이 과연 드라마에서처럼 그렇게 열렬히 면천을 꿈꾸었을지 알아보도록 하자. 
현대 산업사회에서 사용자는 법적으로 대등한 계약을 통해 노동자를 고용한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물건을 소유한다는 관념으로 일꾼을 소유했다. 법적으로 대등한 인격체를 하인으로 부린다는 것은 그때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흔히 머슴으로 불린 고공(雇工)은 계약을 체결하고 노동을 했다. 따라서 머슴 혹은 고공은 원칙상 양인이었다. 
그런데 17세기까지는 머슴보다 노비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래서 17세기까지는 노비가 산업현장의 대표적인 노동자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남의 밑에서 일하려면 그 사람의 노비가 되어야 한다'는 관념이 지배적이었다.

    조선시대에 전체 인구에서 노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보통 40~50% 정도였다. 이렇게 인구의 상당수가 노비였고 그들 대다수가 노동자 역할을 했기 때문에, '먹고 살려면 남의 밑에서 일하는 노비가 되어야 한다'는 관념이 지배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구암 허준>에서 나온 것처럼, 노비들은 항상 면천을 열망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다'가 정답이다. 
노비는 크게 공노비와 사노비로 구분됐다. 이 중에서 공노비(관노비)는 선상노비와 납공노비로 구분됐다. '선발된 노비'라는 뜻인 선상(選上)노비는 관청에서 무보수로 근무하고 비번을 활용해서 영리활동을 했다.
한양의 선상노비는 2교대 근무, 지방의 선상노비는 7교대 근무를 했다. 근무시간 외의 시간을 활용해서 농사를 하건 장사를 하건 그것은 선상노비의 자유였다. 또 선상노비의 일종인 관기가 비번을 활용해서 민간 술집에서 서빙을 보건 자기 농토에서 농사를 짓건, 그건 본인의 자유였다. 또 납공노비의 상당수는 국유지를 불하받은 소작농이었다. 이들은 수확물의 일부를 지주인 국가나 왕실에 납부했다.
사노비는 솔거노비와 외거노비로 구분됐다. 솔거노비는 주인집에 기거하면서 주인의 일을 처리했다. 외거노비는 독립적 주거지에 살면서 주로 주인의 농토를 경작하고 수확물의 일부를 납부했다.
위의 네 가지 유형 중에서 면천이 노비에게 확실한 이익을 주는 경우는 선상노비뿐이었다. 선상노비는 관청에서 무보수로 근무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면천이 이익을 의미했다. 그래서 면천을 가장 열렬히 희망하는 쪽은 바로 이들이었다.

    선상노비와 달리, 납공노비, 솔거노비, 외거노비의 경우에는 면천이 이익이 되기보다는 손해가 될 확률이 더 높았다. 국유지를 불하받아 먹고 사는 납공노비의 입장에서 면천은 국유지를 빼앗기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면천은 곧 실직을 의미했다. 솔거노비의 경우에, 면천은 주인집을 떠나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이들에게도 면천은 이익보다는 손해가 될 확률이 더 높았다. 주인집 농토에서 소작농 생활을 하는 외거노비의 입장 역시 납공노비의 입장과 거의 유사했다.
따라서 선상노비를 제외한 나머지 노비들은 면천을 환영하기보다는 거부할 가능성이 높았다. 면천을 받으면 자유인이 될 수 있었지만, 대다수의 노비들한테는 그보다는 생계유지가 더 절박했다. 노비가 되어야만 직장을 구할 수 있었던 시대에 면천은 사실상 '실직'을 의미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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