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가난한 마음이 뭘까? 예전에는 감이 잘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요즘 이 가난함의 의미를 조금 알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 안다고 말할 수 없고 인생을 지금 이정도 살아온 만큼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입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는 살아갈 오늘 하루를 생각하고 밤에 잘 때는 무사히 지나간 오늘 하루의 일상에 감사하는 사람들입니다. 간혹 오래 전 추억을 떠올리거나 미래를 상상해 보지만 그것은 잠시, 바로 현실로 돌아와 오늘을 열심히 사는 사람입니다.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잃어버리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헤르만 헤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큰일은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사소한 일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당연시하는 것이야말로 몰락의 시작이다.”라고 말입니다. 사람들이 언제부터인가 평범한 일상을 즐기며 살아가는 삶의 여유와 느긋함을 잃어버리고, 더 크고 더 강한 위치의 삶, 남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마치 전쟁을 방불케 하는 치열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현재 내가 누리고 있는 평범한 것들, 일상적인 것들에 감사하지 못하고 뭔가 특별하고 자극적이고 감각적인 것만을 찾아 핏대 오른 눈에 불을 켜고 살아가는 사회는 정말이지 삭막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필요한 만큼만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얼마 전 교회 지하에 널려져 있는 책들을 책장에 정리하면서 이런 생각 하나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책 욕심!” 지하 방 하나 전체에 빙 둘려 놓여 있는 책장에 빼곡히 꽂혀있는 많은 책들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많은 책들 중에는 보지도 않을 거면서 목사라는 허위의식을 채우기 위해 거금을 들여 사다가 꽂아 놓은 장식용 책들도 보였습니다.
럽의 한 인류학자가 원시사회를 연구하기 위해 남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을 찾아갔습니다. 의식주를 모두 자급자족하는 이 부족은 다툼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평화로웠습니다. 그런데 원주민들은 생산성이 떨어지는 돌도끼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인류학자는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며 쇠도끼를 원주민들에게 나눠 주었습니다. 과연 학자의 말대로 쇠도끼를 사용하자 10시간 걸리던 일이 1시간에 끝났습니다. 그러나 한 달 뒤 원주민들을 다시 찾은 인류학자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원주민들은 돌도끼를 사용할 때처럼 10시간씩 일을 해서 땔감을 얻는 대신, 1시간만 일해서 쇠도끼를 사용하기 전과 똑같은 분량의 땔감만 얻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인류학자가 원주민들에게 물었습니다. “이 쇠도끼로 예전처럼 일한다면 열 배를 생산할 수 있는데 왜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왜 열 배나 더 생산해야 합니까? 우리가 쓸 만큼 생산하면 충분합니다.” “쓰고 남은 건 팔면 돈을 벌 수 있습니다. 그 돈으로 다른 것도 사고, 저축도 할 수 있지요.” 그 순간 원주민들의 얼굴이 어두워졌습니다. “우리는 재산을 소유하지 않아요. 재산을 만들면 틀림없이 누군가를 지배하려 할 테고, 누군가의 재산을 빼앗고 싶어질 테니까요.”  원주민들은 필요를 초과하는 생산물을 '나쁜 것'으로 여겼습니다. 인류학자는 비로소 다툼이 없는 사회를 이루고 사는 그 부족의 '지혜'가 무엇인지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 지혜란 바로 '필요한 만큼만 생산함으로써 욕심이 생기지 않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마음이 가난한 마음 아닐까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입니다. 거대담론과 물신주의가 팽배한 현실 속에서도, 큰 것이 아니면 발붙일 자리가 없는 것 같고 모두가 큰 것만을 향해서 달려가는 세태 속에서도, 작은 것들이 주는 삶의 소리를 들으려고 하고 작은 것의 아름다움을 보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외모, 외형,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강조되고, 그래서 너도나도 명품을 입으려고 하고, 성형수술이 일상이 되어버렸고, 그래서 내면의 아름다움을 가꾸는 사람은 고리타분한 사람이 되어버린 세상 속에서도 오히려 못생김 속에 들어있는 아름다움, 연약함 속에 들어있는 강인함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저변으로 밀려나있던 '못생긴 것'을 통해서 '희망' 혹은 '소망'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작은 것에서 큰 아름다움을 보고, '잘생겼다' 혹은 '못생겼다'는 사회적인 편견을 벗어버리고, 못생김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움 볼 줄 아는 마음, 그 마음이 가난한 마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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