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청년들에게 자살을 충동질한다는 이유로 금서의 역사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되었다. 이 소설을 읽은 청년들 사이에는 자살 신드롬이 일었고, 독일 정부는 이에 대응해 다양한 조치를 시행했었다. 제임스 조이스의 걸작인 ‘율리시스’도 음란소설이라는 이유로 처음엔 천대를 받았다. 그러나 초판이 나온 지 10년이 지나서야 본토인 아일랜드가 아니라 미국에서 예술작품으로 인정받았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열여섯 살 소년이 창녀에게 동정을 잃었다고 묘사되어, ‘보바리 부인’ 은 불륜을 미화한 탓에 금서가 되었다. 20세기 초 독일문학의 이단아로 불렸던 프란츠 카프카는 살아있는 동안 자신의 글을 출간하는 것을 모두 금지했다. 그는 죽기 전에 절친이었던 막스 브로트에게 편지를 써서 “내 모든 유고, 일기, 원고, 편지를 읽지 말고 남김없이 불태워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브로트가 카프카의 유언을 따르지 않은 덕분에 오늘날 너무도 유명한 작품 ‘성’ ‘소송’ ‘실종자’ 등 몇 편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7.80년대 한국에서 금지된 곡은 무려 200여 곡이 넘는다. 이유도 여러 가지였다. 이장희의 <그건 너>는 늦은 밤까지 잠 못 드는 이유가 유신 체제 때문이냐며 못 부르게 했다. 배호의 <0시의 이별>은 0시부터 통금인데 0시에 이별하면 어떻게 하느냐며, 신중현의 <미인>은 “한번 보고 두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로 시작되는 게 퇴폐적이어서 금지되었었다. 심수봉의 <순자의 가을>은 대통령의 부인 이순자의 이름을 썼다고 해서 <올 가을엔 사랑할거야>로 바뀌어 나와야 했고, 송창식의 <왜 불러>는 경찰의 장발 단속에 저항한다고, 한대수의 <물 좀 주소>는 물고문을 연상시킨다고, 동백아가씨 등 이미자 노래 전부는 퇴폐적이어서, 아침이슬을 포함한 통기타 가수들 노래의 대부분은 새마을운동을 방해하는 반사회적 가요라는 게 금지된 이유였다. 심지어 <독도는 우리땅>도 한때는 일본을 자극한다고 금지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금지 초치에도 불구하고, 이제껏 금지되었던 원고들은 모두 읽혔고, 금지된 노래도 어떤 경로를 통해서라도 세상의 빛을 보았다. 비록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이들의 작품들이 늦게나마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작가들의 뚜렷한 의도가 후세들에 의해 재확인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너무도 빠르게 변하는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는 또 다른 의미의 검열 기준을 정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무자비한 인터넷 댓글과 출처 불분명한 정보의 홍수 속에서 무엇을 믿어야 할지, 무엇을 믿지 말아야 할지 헷갈리고 있다. 그 동안 공개적으로 인신 공격을 일삼는 비윤리적인 인간들 때문에 자살을 선택했던 많은 연예인들은 더 이상의 가슴앓이를 포기하고 강력한 법적 대응을 선택하기에 이르렀고, 가슴을 후벼 파는 인터넷 악성 댓글 현장은 때때로 차단되어 접근 금지구역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법조계는 악성 댓글 작성자를 끝까지 추적해서 처벌을 하는 것이 한국사회의 대세가 되었다.

    이처럼 출처가 분명했던 것들에 대해 금지령을 내리는 일은 아예 출처가 없는 것에 비하면 훨씬 수월한 편이다. 이를 노린 사건이 덴버에서도 간혹 벌어진다. 최근 덴버 한인 커뮤니티에서는 현 노인회를 비방하는 정체불명의 ‘삐라’가 뿌려졌다. 필자가 이 노인회 관련 삐라를 지인으로부터 전해 받은 시기는 한 달여 전이다. 많은 한인들의 집에 일일이 배달된 이 편지의 제목은 ‘똥개들의 오입잔치’로 되어 있다. 제목에서 보여지듯이 차마 읽기에도 거북한 말들이 가득 적혀 있다.
편지 속 등장 인물만 딱 봐도 이번 노인회장 선거에 대한 불만을 표출한 일종의 선거 잡음임을 알 수 있었다. 남의 사생활에 개인적인 관심을 가질 수는 있겠지만 근거 없는 비방성 삐라가 나도는 현상은 인터넷 악성 댓글이 만연한 한국사회보다 더욱 심각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이 편지를 보면 개인적인 남녀관계를 참 조잡하게도 적어놓았다. 하지만 내용의 사실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글쓴이 자신의 이름조차 떳떳이 밝히지 못하는 내용이라면 상고할 일말의 가치조차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번 노인회장 선거에는 분명 절차상 문제점이 있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이런 삐라가 뿌려진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문제의 핵심을 처리하지 않고, 비껴가는 모습에서 오히려 정당성을 잃을 수도 있다. 이 편지가 출처와 정당한 의도를 가진 금서가 아니고, 단지 추잡한 낙서로 여겨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번 노인회 삐라 사건은 우리 2세들에게 참으로 부끄러운 낙서가 아닐 수 없다. 이 삐라 또한 언젠가는 글쓴이가 반드시 밝혀지겠지만, 그 이전에 치기 어린 장난과 같은 이런 삐라가 우리 동포 사회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과감히 무시해 버리는 판단력이 요구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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