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나리자 미소 위해 악사?광대 동원했다

    세계적으로 가장 사랑받는 초상화는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의 ‘모나리자( Mona Lisa)’다. ‘모나리자’는 개발되지 않은 풍경을 배경으로 탁 트인 실내에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머리를 베일로 덮고 복잡한자수로 장식된 검정 가운을 입고 앉아 있는 여인을 그린 초상화다. 현재 루브르(Louvre)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판넬(Panel)에 그린 유화로 크기는 ‘30 4/5 X 21 1/5 inch’이다.
세부 묘사가 뛰어난 모나리자는 19세기 중반 이후부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 중에 가장 유명해졌다. 1911년 8월21일, 루브르 박물관에 일하던 이탈리아인 비첸차 페루지아(Vicenzo Peruggia)가 ‘모나리자’ 그림을 훔쳐 옷 속에 감추고 뒷문으로 빠져나와 2년간 숨겨두었다가 1913년, 플로렌스에 있는 화랑(Art dealer Alfred Gori)에 팔려다 잡혀서 7개월간 감옥살이를 했다. 그림을 훔친 페루지아는 “이탈리아 그림이니까. 이탈리아로 옮겨온 애국심”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모나리자’는 현대 화가들이나 광고 등에서 모방하는 것은 물론 의학계에서도 모나리자의 미소나 병명에 대해 견해를 표할 정도로 사람들에게 여전히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모나리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서명이나 날짜가 기록되지 않아 작품을 둘러싼 해석이 분분하지만 그 탄생한 배경은 알려져 있다.
모나리자의 모델은 피렌체 공화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상인 조 콘다가 아내 리자가 아들을 낳기 전에 집을 구입해 집안을 장식하기 위해 초상화를 의뢰한 것이라는 배경이 가장 유력하다. 하지만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모나리자를 완성한 후에도 계속 소장하고 있어 조 콘다의 부인 초상화라는 배경에 의혹이 있다.
또 제작 연도가 1503년부터 1507년으로 추정되고 있는 이 초상화를 의뢰인에게 주지 않고 남은 여생동안 간직했기 때문에, 그림 속엔 자기를 낳아준 엄마 카타리나의 인상도, 또한 본인의 인상도 포함되었다고 평하는 사람도 있으며 화가 자신의 자화상을 여성화하여 그린 것이란 이야기도 있다.
‘모나리자’는 르네상스 시대의 작품으로서는 매우 혁신적인 작품이다. 당시 초상화에서 인물을 배경보다 높이 배치하는 방식은 오늘날 화가들이 흔히 사용하는 방법이지만 르네상스 시대에는 드문 방식이었다. 또한 윤곽선을 강조했던 이전의 다른 화가들의 작품과 달리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모나리자’에서 명암법을 이용해 풍경과 인물이 구별 짓기 어려울 정도로 일치감을 보여주고 있다.
화면 왼쪽 배경에는 작은 오솔길, 오른쪽에는 말라붙은 강바닥이 보이지만 그 뒤에 있는 저수지와 연결하는 부분은 확실하지 않다. 그는 이 작품에서 윤곽선이나 경계선이 없이 어두운 밑바탕에서 시작해 반투명 유약으로 칠해나가면서 입체감이 느껴지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스푸마토 기법을 사용했다.
이 작품을 가장 유명하게 만든 것은 보일 듯 말 듯한 신비스러운 모나리자의 미소다.
모나리자의 입에는 숨겨진 미소가 있다. 모나리자의 눈을 쳐다보면 입술에 미묘한 미소가 나타나지만, 시선을 입으로 이동하면 미소는 사라진다. 모나리자 얼굴의 어디를 보느냐에 따라 표정이 달라지는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공식 초상화의 우울한 분위기를 제거하기 위해 이 작품을 제작할 당시 악사와 광대를 화실에 초청해 모델의 자연스러운 표정을 이끌어냈다고 한다.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내기 위해 광대와 악사를 동원했던 것과는 달리 이 작품은 고통의 긴 과정 속에 탄생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화가는 작품을 수정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모나리자’를 수년에 걸쳐 제작하는 동안 끊임없이 그리고 수정하고 덧칠했다. 모나리자의 옷과 베일(Veil), 오른손, 하늘 등이 너무 여러 겹으로 색칠해졌고, 그림을 보호하기 위해 엷은 초록색의 dirty vanish 로 덮여 있고, 액자에 넣기 위하여 초상화 양쪽을 3 inch 정도 자르기도 했다. 한 때는 초상화를 두꺼운 Vanish 를 벗겨서 말끔하게 하려 하였으나, 많은 화가들과 그림 애호가들의 반대가 있었고, 특히 인상파 화가 드가(Degas)가 반대하여 그대로 두었다.
‘모나리자’는 크기가 77×53㎝밖에 안 되는 백색 포플러 나무에 유화로 그린 패널화지만 그 당시 액자에 넣을 수 있는 최초의 그림이었기 때문에 크기가 작다. 그렇지만 이 작품은 르네상스 회화의 기준을 정립한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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