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머리의 여인이 벌거벗은 채 당당하게 임신한 몸을 드러낸 채 옆으로 서서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본다. 옆모습은 둥글게 부풀어오른 배를 가장 잘 드러내는 자세이다. 아이를 잉태함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예고하며, 무력한 인간이 죽음에 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다. 그래서인지 임신한 여성이나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 뺨이 통통하고 분홍빛을 띠는 아이가 등장하는 그림을 보면 희망을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이 그림은 희망과 동시에 불길한 느낌을 준다. 무엇이 미래의 어머니와 곧 태어난 생명의 모습에 불안을 드리우는 것일까?
여인은 기묘한 장식들로 뒤덮인 비현실적인 공간에 서있다. 장식에 뒤섞여 있는 검은 존재, 위협적인 힘을 상징하는 생명체는 게걸스럽게 여인을 삼켜버릴 듯 하다. 여인의 형상을 한 그로테스크한 얼굴들은 임신한 여인의 삶을 위협하는 적대적 힘을 상징한다. 하지만 여인은 정면으로 고개를 돌리고 그들의 존재를 깨닫지 못한다.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가 그린 ‘희망1’이 제목과는 달리 불길함이 더 강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검은 괴물과 기묘한 얼굴들, 여인의 머리 바로 위에 있는 죽음 때문만은 아니다.
미술사상 보기 드문 소재인 임산부를 주제로 대담하고도 노골적으로 묘사한 이 작품은 임신이 인류의 희망이라는 위대한 주제를 상징하고 있다. 이 작품은 임산부를 표현했음에도 클림트의 에로틱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클림트는 임신한 여인의 벌거벗은 몸을 보여줌으로써 완벽한 여성상, 생명과 육체의 찬가를 보여주고 있지만 임신한 여성의 얼굴은 타락한 요부로 묘사했다. 요부의 얼굴은 남자를 유혹하는 악의 화신을 암시한다.
임신한 배 위에 깍지를 낀 여자의 양손은 인류의 희망을 암시하고 있다. 그것은 결국 희망은 새 생명의 탄생이라는 것이다.
이 작품은 현실적인 주제와 비현실적인 주제가 한 화면에 나타나는 클림트만의 구성요소가 지닌 특징을 보여준다. 죄, 질병, 죽음, 빈곤, 탄생할 생명 등이 화면에 나타나고 있는데 임신한 여성은 희망을, 여성의 머리 뒤로 보이는 해골은 죽음을 상징하면서도 성욕의 치명적인 올가미를 암시한다.
‘희망1’의 최고공개는 1909년 제 2차 쿤스트쇼에서였는데, 예상대로 논란이 일었다. 이 그림은 놀랍고 충격적이면서 동시에 너무나도 분명하게 에로틱한 이미지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임신한 여인의 누드가 외설적이고 불길한 느낌을 주는 이유는 벌거벗은 그 여인이 누군가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제작할 당시 클림트는 모델이자 자신의 정부였던 미치 짐머가 두 번째 임신 중이었다. 클림트는 그녀의 임신한 모습을 보고 영감을 얻어 작품을 제작하고 싶었고 마침 모델들 가운데 헤르마라는 여인이 임신 중이었다. 임신한 헤르마는 모델을 그만두고 싶었으나 가정 형편상 그만둘 수 없었다.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가난한 임산부였던 그녀는 클림트의 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파격적인 포즈로 화폭 앞에 서게 된다.
클림트는 임신은 남성의 성적 승리의 증거지만 그녀가 낳을 아이는 남자에게 지울 수 없는 고통을 선사한다고 생각해 새 생명을 잉태한 작품 속 여성 주변에 고통과 번뇌, 죽음을 담았다.
위협적인 얼굴들이나 화려한 장식들로 비중이 약해지긴 했지만, 그림 속 여인은 몹시 관능적이다. 어깨 위로 구불거리는 붉은 머리카락이나 바라보는 사람을 꿰뚫을 듯한 시선, 머리카락을 장식한 작은 꽃들.
‘희망1’은 전반적으로 애매한 구성과 색채로 이루어져 모성에 대한 서로 다른 다양한 해석을 가능케 한다. 이 애매함은 심리적인 측면과 성적인 측면 양쪽에 다 존재하는데, 이것이  여성의 성 혹은 여성성에 내포된 애매함과 잘 맞아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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