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년 전 시애틀에서 첫 아이를 낳고 먹고 살기 막막할 때였다. 우리 부부는 재벌가의 상속자들이 아니었기에 학생비자로 유학생활을 유지하면서 학비를 조달하고 큰아이 우유값까지 버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학교를 의무적으로 다녀야 하는 신분이었다. 우리는 큰 꿈을 안고 공부를 하기 위해 미국에 왔지만 아이가 태어나면서 공부보다는 돈을 벌어야 했다. 그래서 생각 끝에 미주에서 가장 규모가 큰 한국일보에 이력서를 제출해 보기로 했다.  LA, 뉴욕, 시카고 지사에 이력서를 보냈다. 그 중 시카고 지사에서 필자의 영주권을 스폰서할 의향을 보내왔고 난 제왕절개 수술로 큰 아이를 낳은 지 채 5주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시카고로 면접을 보러 갔다. 다행히 한국에서 받은 신문학 석사학위가 힘을 발휘해 취직을 하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시카고 지사에 적당한 자리가 없어서 당시 시카고 지사 관할이었던 덴버 지사 한국일보로 임시 발령이 내려졌다.  공부를 하겠다던 우리의 꿈은 미루어졌지만, 더 이상 의무적으로 학교도 가지 않아도 되니 그나마 경제적이 부담이 줄어든 것에 감사하기로 했다. 이렇게 신분 해결을 위해 시작된 것이 미주 한인 언론사에 발을 담근 이유였다.

    낯선 덴버 땅에 도착했지만 내가 예상했던 언론사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일간신문 두 개와 세 개의 주간 신문사가 있었지만 모든 신문사는 서너명의 소수 정예로 운영되고 있어 한국으로 치자면 자그마한 동네 신문배달소 수준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였다. 워낙 한인 인구가 적고, 신문사 수익이 적기 때문에 이런 경영체제가 당연하다는 얘기에 공감을 하면서 그냥 영주권 나오기만을 조용히 기다리기로 했다. 하지만 엄연히 텃새가 존재하던 이 시골 동네에 새로운 사람이 왔으니 주변 신문사들의 관심이 많았다. 지금 받는 월급보다 더 줄테니 자기 신문사로 오라는 곳도 있었다. 아주 적극적으로 유혹의 손길을 내밀었기에 잠시 흔들렸다. 하지만 갓 이사온 신입사원의 능력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단지 종이조각에 불과한 학위증명서에 관심을 가지고, 무조건 한국일보사가 망하는 것에만 집중한 제안인 것이 불 보듯 뻔해 거절했었다. 영주권이 목표였기 때문에 그 딴 돈 몇 푼을 더 받는 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필자는 이 좁은 곳에서도 서로 밟고 밟혀야 하는 분위기를 단시간 내에 파악할 수 있었다.
 
     취재거리도 별로 없었다. 일요일에 교회에서 열리는 부흥회나 찬양회의 기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번역기사로 채워졌다. 기사는 써야 했기 때문에 거의 매주 주일이면 교회를 찾아 취재를 했다.  이처럼 책임감은 있으되 영혼이 없는 취재를 한동안 계속했다.  이런 동네의 작은 기사들을 신문 기사화한다는 것에 약간의 회의가 들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이때 만난 사람이 권혁상씨였다. 그는 한국일보, 중앙일보 덴버지사의 국장을 역임하고 당시 한 주간지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덴버 신문사의 상황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임은 틀림없었다. 함께 취재를 마치고 우연히 식사를 할 기회가 있었다. 그의 첫마디는 “현주씨 때문에 덴버 신문의 질이 높아졌어요”였다. 잠시 우쭐했지만 그 동안 책임감과 의무감으로만 적어왔던 기사들을 생각하니 필자는 곧 부끄러워졌다. 권 국장은 내게 신문 만드는 사람들이 감정에 치우쳐 근거 없는 비방과 욕설이 난무했던 덴버 신문들의 과거를 말해주며, 신문 기사를 쓰는데 기본기가 없는 곳이지만 우리 서로 잘해보자며 격려해 주었다. 지지부진했던 기자의 역할에 새로운 동기를 부여해준 셈이었다.

      권 국장이 LA로 떠나기 전까지 우린 곧잘 만났다. 함께 밥을 먹기도 했고, 막걸리도 한잔하면서 노인회 문제, 한인회 통합, 기사 쓰는 방향 등에 대해 꾸준히 의견을 주고 받았다. 그도 오랫동안 자신의 홈 타운인 남미의 언론사에서 일을 했고, 나 또한 10여 년이 넘게 한국에서 언론사 생활을 해온 탓에 우린 만나면 할 말이 많았다. 때때로 다른 의견을 제시할 때면 또 다른 관점에서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을 키우기도 했다. 비록 소속된 회사는 다르지만 우린 함께 언론의 사명을 짊어진 동지라고 생각하면서 언론의 역할 충실하기 위해 노력했다.

     필자가 한국일보에서 쫓겨나 포커스 신문을 창간했을 무렵 그는 LA로 가족과 함께 떠났다. 그런데 몇 년 뒤 다시 덴버로 돌아온 그는 놀랄 만큼 수척해진 얼굴과 나빠진 건강상태를 보였다. 하지만 권 국장의 신문에 대한 관심과 글에 대한 열정은 그 어느 누구보다도 높았다. 얼마전 길에서 우연히 권 국장을 만난 적이 있다. 그때 필자는 권 국장에게 많이 아파 보이는데 어떻게 매주 글을 쓸 수 있냐고, 건강한 나도 매주 글 쓰는 것이 너무 피곤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정말 그 사람다웠다. 그는 “글을 쓰는 것이 나를 지탱하는 힘”라며 피식 웃었다.
 누구보다도 콜로라도 한인 언론의 발전을 염원했던 그가 지난 주 토요일 세상을 떠났다.  늘 동지이고 볼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잦은 안부 인사가 필요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필자가 안부 전화를 할 때마다 그는 늘 병원에서 투석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항상 반갑게 대화를 이끌어가던 그가 있었기에 필자는 새로운 용기를 가지기도 했다. 이제 그런 동지가 없어 몹시 아쉽다. 그의 바람대로 함께 이 곳 언론을 이끌어가지 못해 안타깝다. 하지만 그의 짧은 오십 평생은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과 용기가 되었을 것이라 믿는다. 그가 모든 짐을 내려놓고 평안히 잠들길,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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