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주 리치몬드시에서 지난주 공립학교 교과서에 동해 병기를 의무화하는 법안이 하원 전체회의를 통과했다. 주지사가 서명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만큼 7월1일부터 법이 시행돼 버지니아주를 비롯한 미국 남부 7개주에서 ‘동해(East Sea)’와 ‘일본해(Sea of Japan)’를 병기한 교과서로 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연방정부가 일본해 단독 표기를 공식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치적 영향력이 큰 버지니아주가 입법을 통해 동해 병기를 의무화한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버지니아주 의회는 작년 가을부터 공립학교 교과서에 ‘일본해’로만 써 오던 지금까지의 표기 방식 대신 일본해와 동해를 함께 쓰는 안건을 다뤄왔다. 버지니아주에 사는 15만 한인 교민들은 한인 2세들이 배우는 교과서에 일본해로만 쓰여 있는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3년 넘게 동분서주했다. 2012년 1월 버지니아주는 이 안건을 올리는 데 성공했지만 상원 교육위의 문턱도 넘지 못했다. 그로부터 2년여 만인 지난 1월 동해 병기 법안은 압도적인 표차로 상원 교육위와 상원 전체회의를 통과했고, 6일 버지니아주 하원 전체 회의에서 마지막 표결이 실시됐다. 찬성 81, 반대 15표로 예상보다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 동안 미국 교과서는 일본해 단독 표기를 시행해왔지만 이는 국제 지도 제작의 일반 원칙에도 어긋나는 일이었다. 두 개 이상의 국가가 공유하고 있는 지형물에 대한 지명은 관련국 간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각각의 국가에서 사용하는 지명을 병기한다는 게 국제수로기구(IHO)와 유엔지명표준화회의의 분명한 결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IHO라든가 유엔, 미국 연방정부 등은 한국 정부의 동해 병기 요구를 회피하거나 그에 대한 결정을 미뤄왔다. 때문에 버지니아주의 이번 입법은 한·일 양국의 외교전에서 첫 승리라는 점에서도 각별한 의미가 있다.
 
    동해를 일본해로 단독 표기하는 것은 한국으로서는 도저히 간과할 수 없는 문제다. 울릉도가 일본해에 있는 섬이고 속초 앞바다가 일본해일 수 없다. 역사적으로도 동해는 일본이라는 국호가 등장한 시기보다 700년 앞서 사용되었고, 특히 일본해라는 명칭이 국제사회에 자리 잡은 데는 일본 제국주의 침탈이라는 어두운 과거사까지 자리하고 있다. 이런 역사적 배경은 일본의 강력한 로비에도 불구하고 이번 법안이 의회에서 압도적 찬성으로 가결된 결정적 요인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입법기관에서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을 찬찬히 받아들이고 이해해준 데는 한인사회가 힘을 합친 민간차원의 호소가 중요했다. 박수쳐 줄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까지 교과서에 동해라는 지명을 볼 수 없었던 것은 일본의 외교력과 방해공작 탓이었다. 이번에도 일본은 어김없이 버지니아주 의회의 법안 통과를 막기 위해 쓸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했다. 현지에서 영향력이 큰 로비 회사를 고용했고, 일본 정부 유력 인사들까지 나서서 공개 및 비공개로 “일본과 버지니아주 사이의 경제 협력에도 큰 차질이 빚어질 것”이라는 식의 압박을 서슴지 않았다.
최근 프랑스에서는 세계 최대 만화 축제인 앙굴렘 페스티벌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한국만화기획전’이 개최되었다. 이때도 일본정부는 아시아관내 전시 부스에 ‘일본군은 위안부를 강제 동원하지 않았다’는 내용을 담은 만화를 전시했으나, 주최 측이 ‘정치적 선전’이라는 이유로 이를 철거하도록 했다. 일본 측은 한국의 위안부 만화 기획전도 정치적이라는 이유로 철거를 주장했지만, 한국의 위안부 관련 기획전은 “정치적인 사안이 아니라 여성 인권과 역사의 문제”라며 전시를 허용했다. 이 또한 일본의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세계적 만화 전시회에서도 우리 측 위안부 역사 만화가 큰 인파를 모으면서 일제 만행을 널리 알리는 역할을 했다. 이 역시 국제사회에서 민간 차원의 단합이 주효했던 성공 사례다.
  이번 버지니아의 입법 과정에서 한인사회가 큰 역할을 한 데 힘입어 교과서 동해 병기 입법화 운동이 뉴욕, 뉴저지주 등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런 분위기를 잘 살려 미주 한인사회 전체가 동해 표기 문제에 대해 한층 전략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한국과 일본은 현재 위안부 문제를 포함한 일본의 침략 역사 부정 및 독도 영유권 주장, 동해 표기 등을 놓고 세계 곳곳에서 맞서고 있다. 이 중 단시간 내에 한국의 일방적 완승으로 끝날 수 있는 사안은 하나도 없다. 어느 쪽이 세계가 더 공감할 보편타당한 논리를 갖고 여론을 움직이느냐에 따라 성패가 갈릴 것이다. 따라서 장기전이 될 수밖에 없고, 전국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개별 단체들이 움직이는 것보다 대표성이 있는 단일조직을 만들어 전략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콜로라도 한인사회 또한 집안싸움만 해온 세월은 잊고 동해부터 찾아보는 건 어떨까. 어떤 단체에서 앞장 설 것인가 하는 주도권에 대한 미묘한 경쟁심리는 간단히 해결할 수 있다. 현존하는 여러 단체의 장들이 모여 한인사회의 목소리를 대표하는 기구를 만들면 된다.
동해병기 의무화 법안의 버지니아주 의회 통과 과정에는 미주 한인의 목소리, 민주당 소속인 마크 김 주 하원의원, 공화당 소속인 티머시 휴고 주 하원의원 등의 주역이 있었다. 한인의 목소리는 동해병기 운동을 주도적으로 진행했고 김 의원은 의원들의 설득작업에 나섰으며 휴고 의원은 앞장서서 법안을 발의했다. 결과는 한인들의 현안을 담은 법안이 주의회 상·하원에 동시 제출돼 압도적인 표차로 통과함으로써 미주 한인 이민 111년 역사에서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이 곳 콜로라도에서도 그런 역사적인 현장을 맞이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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