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추운 겨울 밤에 어느 가정에서 한 살짜리 아기의 생일 파티가 있었다. 부부는 손님 접대로 분주한 가운데 손님들의 무거운 겨울 외투를 받아 침대에 올려놓기 시작했다. 생일 파티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점 더 흥이 더해만 같고 마침내 생일 축하 케익을 자를 시간이 되어 생일의 주인공을 찾는데 어디에서도 보이지가 않았다. 그제서야 아기의 엄마는 잠자는 아기를 침대 위에 눕힌 것이 생각나 침실로 달려가보니 아기는 무거운 겨울외투들에 눌려서 이미 숨진 후였다. 우리는 이렇게 정작 무엇이 더 중요한가를 모르고 살 때가 종종 있는 것은 아닐까.

      인간이란 보이지 않는 영혼과 보이는 육체가 함께 한 몸을 이루고 있는 인격체다. 본질상 상대성을 가졌으면서도 절대성을 추구하는 마음, 곧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진 존재이다.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이다. 그런데 종종 예배형식에 치우칠 때가 너무 많은 것 같다. 예배에서 주인공인 하나님은 안 계시고 인간들만 만족하는 예배로 변질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의 신앙은 곧 영생의 삶이다. 생명의 법칙인 알맹이 되는 내용이 형식이라는 껍질에 둘러싸여 있는 것이다. 생명은 보이는 껍질 안에서 보존되는 것이다. 인간은 한쪽으로 치우치기 쉬운 존재여서 내용을 중시하다 보면 형식을 무시하게 되거나, 형식에 매달려 내용을 놓쳐버리는 연약한 존재다.
모든 곡식과 과실은 껍질이 먼저 생긴 후에 알맹이가 형성되어 여물어가고, 생명의 근원되는 씨눈은 맨 나중에 생긴다. 기독교적 시각은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가 이원론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나라는 곧 하나님 나라의 섭리적 시작으로 존재한다. 역사의 주관자는 피조물 된 사람도, 천사도, 사단도 그 어떤 피조물이 될 수 없고, 오직 세상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신 삼위일체의 하나님뿐이시다.
그러므로 세상의 역사를 인간의 육적 시각으로 보면 피조물의 뜻대로 돌아가는 듯싶지만, 성경은 말하기를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는 일이 없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형식주의와 심지어 사단의 역사라도 하나님의 섭리 밖에 있는 일이 아니고 모두 하나님의 섭리 안의 일이다.
내용이 중요하지만 형식 또한 필요하다. 내용을 위한 형식이다. 그러므로 의식을 포함한 모든 형식(외부적 행함) 속에 내용이 없는 신앙은 심각한 질병이다. 복음의 핵심 되는 십자가의 도를 깨닫게 되면 새로운 차원의 형식을 이루게 된다. 속이 변화된 후의 형식은 과거의 형식과 질적으로 다르다.
성소 휘장이 찢어지듯 율법적 틀이 무너지고 새로운 복음적 틀을 형성한다. 말씀을 보는 눈도, 기도도, 찬송도 예전의 것과는 차원을 달리하게 된다. 새로운 차원에서 목표가 세워지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나 자신과 세상과 싸우며 영적 가나안 정복 전쟁을 끝까지 계속 한다.
감추어진 하늘의 보화 곧 복음을 온전히 깨닫는 일이 다시없는 축복이다. 그러므로 그 보화를 영원히 보존하기 위해서는 아무리 신령한 성도라도 육신입고 사는 이 세상에서 훈련과 연단을 받아야 하고, 일용할 양식을 벌어야 하고, 가족을 돌보고, 교회의 한 지체로서 역할을 다하기 위한 삶을 살아내야 한다. 균형이 중요하다.

      이것은 기독교의 종말론에 관계된 것이기도 하다. 때와 기한을 인간이 알 수 없다. 어느 때에 인간 역사의 종말이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종말이 언제 오든 오늘의 현실을 잘 살아내야 한다. 적어도 자기 자식들과 가까운 이웃과 친척을 부지런히 가르치고 깨우치고 전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초보자들을 가르치고 아울러 복음을 만방에 전파하면서 복음을 수호해 가기 위해, 주일성수, 공예배 모임, 십일조, 예배당 세움, 직분자 세움,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전도와 선교와 목회운영 등 모든 것에 힘써야 한다. 형식은 내용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목적은 성령과 진리의 말씀으로 드리는 예배다.
성도 중에는 복음의 핵심(십자가의 도)을 깨닫고 너무나도 감사하고 감격하며 영적으로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는 신령한 복을 받은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보이지 않는 내용 중심으로만 치우쳐 중요한 예배 의식 등을 너무 무시하여 소홀히 한 나머지 지금까지 그들이 소중히 붙잡았던 내용을 제대로 간수하고 보전하지 못하는 경우를 본다.
보이는 현실적 의식으로 이루어진 형식을 무시하고 보이지 않는 의의 말씀의 내용만을 붙잡고 너무나 좋아하다가 그만, 내용(복음)을 보전하지 못하고 신앙의 기본을 상실하며 혼돈과 좌절과 고통과 방황 속에 유리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왜 그런 것인가?
내용이 보이는 형식의 껍질 안에 보존되는 원리를 모른 까닭이다. 내용을 형식으로 싸매지 못하면 육신 세상 현실을 통과하며 복음을 끝까지 수호하지 못한다. 계속되는 세상 현실의 시험과 환난과 고통의 문제를 극복할 힘을 얻지 못한다. 껍질을 벗겨버린 알맹이는 쉬 깨어지거나 상하여 오래 보존되지 못하는 것이다.
쌀알도 껍질 속에 보존되어야 벌레도 생기지 않고 오래도록 간수하게 되고, 때를 따라 먹을 만큼만 껍질을 벗겨 밥을 지어야 밥맛도 좋고 영양도 좋은 이치와 같다. 형식과 내용을 치우침이 없이 균형 있게 유지해 가는 일은 매운 어려운 일이다. 치우치기 쉬운 인간의 육적 성질을 최대한 십자가에 못 박을 때 그 균형을 세워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요컨데, 형식 없는 내용은 보존될 수 없고 내용 없는 형식은 쭉정이일 뿐이다. 형식을 깨뜨려야할 때와 형식을 중시하고 다시 세워야 할 때를 분별하자. 형식에도 내용을 위한 형식이 있는 반면, 내용(알맹이)이 없는 가운데 외식에 그치고 마는 형식이 있다. 여기서 외식이라 함은 단순한 가식의 차원이 아니라, 영혼의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고 육신에만 관계되어 행하는 모든 것을 말한다.
실질적 내용 곧 속사람의 열매가 없는 것이다. 아무쪼록 우리는 건전한 형식 가운데 참다운 내용으로 채우자. 영생의 복음, 진리의 말씀 곧 십자가의 도를 통하여 심령과 성품에 있어 절대적 변화를 이루자. 의의 말씀으로 예수님을 닮은 의의 사람이 되자. 임마누엘로 심령 천국을 이루는 가운데 예배, 교제, 봉사와 구제와 선교를 통하여 하나님 통치의 그 나라를 더욱 확장시켜 나아가자. 세상 끝 날까지! 마라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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