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가 죄가 없는 하나님의 아들과 구세주라면 어찌하여서 고난을 받았어야 하였는가?” “예수가 부활하였는 것이 사실이라면, 다시 살아날 것을 왜 꼭 죽었어야 하였는가?” “예수의 죽었다는 것은 이해가 되겠는데, 어떻게 죽은 자가 부활할 수가 있었다는 말인가?” “예수가 수 많은 병자들을 고쳤고 죽은 사람도 살렸다면, 그가 죽은 후에 바로 살아나지 않고 삼 일 후에야 살아나야 하였던 이유는 무엇인가?”라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다.
제사를 드리거나 성전을 지어도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다.  이와 같이, 사람이 죽을 죄를 짓고서는 더더욱 그런 것이다.  죽을 죄를 짓고서 형벌을 받아 고난과 죽음을 겪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다.  모든 인류의 죄와 죄의 삯을 대신 감당하고 지불할 이는 오직 거룩하고 의로우시며 흠이 없었던 예수님 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위기가 발생하면 “나를 보호하라!” 는 세상의 왕들과는 다르셨으니 진실로 메시야이셨다.  각기 자기의 편한 길로 갔던 어리석은 양들을 위하여, 회개했던 죄를 또 다시 짓는 죄인들을 위하여, 그리고 범죄자들을 구원시키려고 애를 쓰는데도 오히려 죽이려고 하는 그들을 위하여서도, ‘내가 너희를 보호하리라’ 고 생각하시면서 자신은 사함을 얻게 하는 피를 흘려 죽으셨다.  예수님은, “나 살기 위하여 너는 망하고 죽어야 해”  “너 죽고 나 살자”  “나부터 살고 너를 건져 주리라” 는 인생들과는 달리, “나는 죽을 테니 너만이라도 살아라” 고 하시면서 가장 비참하고 가장 고통스럽게 죽으셨던 것이다.  예수님이 받았던 고난과 죽음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예언이요 성경 말씀을 이루어도 단지 평안하고 건강하고 장수하고 형통하는 소원을 이루었던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가 불행과 저주와 재앙과 멸망과 죽음이라고 여기면서 외면하고 도망하고 분노할 예언들을 몸소 이루었음에 감격하여야 한다.  그리고 인생이 새사람과 빛의 자녀와 영의 사람과 천국시민과 주의 선하고 충성된 일꾼과 제자와 군사와 형제자매로 변하여 살아야 하는 것이다.
성경을 읽으면,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엘리야와 엘리사에 의하여 각각 살아난 아이들이 있었고,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셨다 (요 11:44).  그리고 베드로가 다비다 (도르가) 를 살리었고 (행 9:40), 바울이 그의 설교를 듣다가 2층에서 떨어져 죽은 유두고를 살렸다 (행 20:9).
예수님의 시신은, 죽은지 삼 일이 지났으니 미생물들로 인하여 분해가 되었기에 진실로 죽은 몸이 된 것이다.  박테리아는 15분 마다 분열을 하고, 약 하루가 지나면 육신이 죽은 냄새, 즉 시신이 섞는 증거가 냄새로 나타난다.  그리고 삼 일이 지나면 냄새가 퍼진다.  나사로가 죽은지 나흘이 되자 섞은 냄새가 진동하였던 것이 지극히 과학적인 사실이다.
또한 예수님이 부활하신 증거는 성서적으로, 역사적으로, 순교적으로 사실이요 진실이요 진리인 증거가 있다.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 가서 그를 만난 막달라 마리아가 있었고,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되돌아 갔고, 제자들이 집안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의심장이 도마가 예수님의 상처난 손과 옆구리를 만진 후에는 순교하기까지 그의 죽음과 부활과 복음을 전하였고, 제자들이 물고기를 잡으면서 예수님의 기적을 체험하였고,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승천하시기까지 그의 말씀을 들은 자들이 많았으며, 예수님이 승천하신 모습을 본 사람들이 있었다.  옛 바울이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변화된 후에는 온갖 죽을 고생과 고난을 겪으며 죽기까지 복음을 전하였고, 단지 일 개의 집사였던 스데반이 예수님을 온전하게 본받으며 순교를 하였고, 제자들은 물론 초대 교회의 성도님들이 더 나은 부활을 하기 위하여 더 큰 고통과 끔찍한 죽음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수 많은 순교자들과 기도의 응답을 받은 자들이 많이 있는 것이다.
그 외의 수 많은 성서적, 역사적, 체험적인 기록들을 고난주간과 성금요일과 부활절을 맞이하면서 모든 사람이 찾아보고 체험하며 진짜 크리스천이요 하나님의 자녀로 발전하길 기원하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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