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침몰 사고가 터진지 20여일이 지났습니다. 오늘이 한국은 ‘어버이 날’입니다. 한국 뉴스를 보니까 한 단체에 속해 있는 학부모들이 “카네이션을 달지 않겠습니다.”라는 현수막을 들고 침묵 행진을 하는 사진이 올라 와 있었습니다. 왜 카네이션을 달지 않겠다고 하는 것일까요? 카네이션을 달아 주는 자식들이 싫어서? 아니면 자식들이 달아 주는 카네이션을 단 가슴을 자신 있게 내밀며 활보하기가 부끄러워서? 아마 후자일 것입니다. 오늘처럼 어른 된 것이 한 없이 부끄러울 수가 없습니다. ‘돈, 돈, 돈’하며 살아왔지 사람을, 생명을 배려하지 못했던 부끄러운 어른들입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속담을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면서도 정작 자신과 관련된 문제 앞에서는 ‘설마’라는 마음속 단어 하나로 너무나도 관대하게 넘어가 버리는, 만성적 안전 불감증 환자들인 우리 모두가 부끄러운 어른들입니다. 이런 몹쓸 죄악으로 생때같은 우리 아이들의 그 곱디고운 생명들을 차가운 물속에 수장시켜 놓고 무슨 어른 자격이 있어 카네이션을 가슴에 달겠습니까?
이번 세월호 사고는 돈이 모든 가치 기준이 되어버린, 그래서 돈 되는 일이라면 사람의 생명도, 그 사람의 생명의 안전도 내 팽개칠 수 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비극이 몰고 온 사건입니다. 세월호 배 안에 갇힌 305명이 구조를 기다리며 생사를 넘나들고 있는 2시간여 동안 선장과 승무원들은 자기 목숨 지키기에 급급했습니다. 선주는 배안의 사람들의 생명보다 배와 화물이 소중했습니다. 생명 구조에 힘써야 할 정부와 해경과 군은 윗선 눈치 보기와 자기체면 살리기와  자신들의 몫 챙기기에 바빴습니다. 사람의 생명의 가치에 대한 배려는 없고 그 몹쓸 ‘관행’만 판을 치는 우리들의 서글픈 자화상입니다.
사람의 생명은 그 사람의 종교, 출신, 학벌과 상관없이 고귀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한 사람의 생명의 가치에 대하여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다”고 언급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생명에 대한 이 성경의 가치 매김에 대하여 도전합니다. 우리가 몸담아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이미 외모로, 학벌로, 그 사람의 출신 배경으로 한 사람의 가치와 몸값을 흥정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자신의 이익 추구를 위해 공공연하게 사람을 이용해 먹는 악한 세대 속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사람은 사랑과 존중의 대상이어야 하지 결코 이용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물질은 이용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 물질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그 물질 때문에 사랑해야 할 사람을 이용해 먹은 웃지 못 할 일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이 벌어집니까? 사람은 사랑하고 물질은 이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반대로 하고 있습니다. 사랑해야할 사람은 이용해 먹고, 이용해야할 물질을 사랑하는 자본주의 시대의 비극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인신매매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사람을 유괴하여 몸값을 요구하는 악한 일이 벌건 대낮에 벌어집니다. 배에 화물을 더 싫기 위해 배의 무게중심을 결정짓는 ‘평형수’를 덜 채우는 사악하기 짝이 없는 짓을 관행이란 이름으로 버젓이 저지릅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화물은 돈이 되기 때문입니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뭇 할 일이 없는 사람들로 채워진 사회는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사회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좀 더 살맛나는 세상이 되려면, 그리고 따뜻한 마음들을 주고받을 수 있고, 서로를 신뢰할 수 있는 공동체를 이루어 가려면 가장 기본적인 너와 나라고 하는 한 생명에 대한 절대적인 존재의미와 가치를 바로 확인하는 일입니다. 이 존재가치가 정당하게 확인되고 평가되어 질 때 우리는 서로를 무시하지 않고 존중하며 정말 존귀하고 보배로운 존재로 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최고로 나쁜 사람은 사람 목숨가지고 장난질 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목숨과 관련된 먹는 것, 안전의 문제를 가지고 규제 철폐하는 논리로 장난질 치는 사람들은 정말 나쁜 사람들입니다. 마치 한 사람의 생명을 자신이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처럼 행세하는 사람, 그 고귀한 목숨가지고 값을 흥정하는 사람은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입니다.
한 생명이 “천하보다 더 귀하다”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다.”라고 하는 우리 예수님께서 매겨 놓으신 사람의 이 가치 매김은 지극히 정당한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에 대한 이 정당한 가치 매김이 너와 나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이 사회와 우리들의 공동체 속에서 확인될 때 좀 더 서로를 소중하게 보듬어 주고 존중하며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오늘도 진도 팽목항에서는 눈에 넣어도 아깝지 않은 자식의 시신이 회손 되지 않은 채 만으로라도 돌아와 주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내 아들아! 미안하다. 아빠가 너에게 아직도 해 줄게 많은데.....”하고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는 한 아버지의 영상을 보면서 저도 한 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 피 눈물을 어떻게 닦아 내야 할까요? 한 생명이 돈보다 소중하고, 한 사람의 생명의 안전이 관행보다, 규제 철폐보다 중요하고, 한 생명을 살려 내는 일이 모든 일보다, 이해관계 보다 우선되어야 한다는 ‘생명의 가치’의 위대함을 외치는 이 외침, “한 생명이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다.”는 말을 천둥 같은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고 살아 갈 때만이 이 피 눈물은 닦여 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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