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작은 아들이 학교에서 카네이션을 닮은 종이 꽃을 만들어 내게 건네주었다. 한국의 어버이날, 미국의 어머니의 날이 다가온 탓이다. 미국에서 살면서 부모님께 카네이션을 직접 달아주지 못한 어버이날이 많아서인지, 유독 엄마 생각이 많이 나는 주이다.
대학교 2학년 여름방학이 시작되던 무렵이었다. 친정 어머니는 필자에게 2백만원을 건네며 유럽여행을 다녀오라고 했다. 엄마는 나를 부산에서 서울로 유학을 보낸 것만으로도 아버지에게 호되게 혼이 났다. 아버지는 “집 옆에 있는 대학에 보낼 일이지, 계집애를 밖으로 내보내려 한다”며 어머니가 못마땅하셨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예 해외로 필자를 보내려고 하니 아버지를 포함한 주변 사람들은 적잖이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엄마는 내게 돈을 건네며 “넓은 세상을 보고 오라”고 했다. 그렇게 떠난 것이 나의 첫번째 유럽배낭여행이었다.

       아버지는 공무원이었다. 공무원의 박봉을 쪼개어 4형제를 대학, 대학원까지 보내면서 생활비도 빠듯했을 텐데 2백만원이라는 거금을 모아 내게 건넨 어머니의 뜻은“당신 같이 살지 말라”는 것이었다. 20대의 풋풋한 시간, 30대의 아름다운 여인의 시간, 40대의 여유로운 시간을 포기하면서 평생을 자식과 남편에게 헌신했던 어머니는 필자만큼은 커리어 우먼으로 당당하게 살길 원했다.
엄마는 스무살에 시집와서 별난 시부모님을 모시고 깐깐한 남편의 비위를 맞추며 살았다. 아버지는 매일 아침 7시에 아침 식사를 하셨는데, 평생 이를 거른 적이 없으셨다. 때문에 이를 준비해야 하는 엄마는 새벽 일찍부터 서둘러야 했다. 더구나 우리 사형제가 연년생이고, 오빠와 필자, 동생이 재수까지 하는 바람에 엄마는 아빠 도시락을 포함해 8년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도시락 13개를 싸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열 개가 넘는 도시락을 어떻게 쌀 수 있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처럼 엄마의 일상은 오롯이 가족에 매여 있었다.

      그리고 필자는 결혼을 해서 미국에 왔다. 엄마에게 멋진 옷 한 벌도 사주지도 못한 채 그렇게 한국을 떠나왔다. 그러나 자식들을 모두 결혼시켜 떠나보낸 후에도 엄마의 고생은 끝나지 않았다. 큰 아이를 낳을 때 필자의 산후조리를 위해 한국에서 시애틀로 오셨다. 건강하지 못했던 첫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인큐베이터에서 첫 주를 보냈고, 다음 한 달 동안은 아동병원에 입원을 해야 했다. 한국에서 막 도착한 엄마가 어떻게 미국병원에서 아이를 간호할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역시 엄마는 달랐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바디 랭귀지를 했고, 요구사항이 있으면 간호사를 불렀다. 그리곤 물컵을 보여주면서 물이, 기저귀를 보여주면서 기저귀가, 우유병을 보여주면서 우유가 필요하다며 손주가 필요한 것을 모두 챙겼다. 미국에 처음 와서 영어발음이 이상하게 들릴까봐, 문법이 틀릴까봐 걱정하던 우리와는 확실히 달랐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영어를 못하는 엄마와 전혀 문제없이 의사소통을 했다. 언니가 아이를 낳았을 때에도 몸조리는 엄마의 담당이었다. 올케 언니가 큰 아이를 낳았을 때도 친정에 사정이 있어 엄마가 대신 몸조리를 해주었다. 늦게 결혼한 동생이 어렵사리 낳은 손녀에 대한 엄마의 정성 또한 대단했다. 이처럼 엄마는 나이가 들면서 자식과 남편에, 우리 4남매가 낳은 손주들에까지 얽매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엄마는 60세가 되던 해 용기를 냈다. 누가 봐도 나이많은 아줌마 혹은 할머니의 모습인 그가 돋보기를 끼고 한자공부를 하고 두꺼운 책을 뒤적거리면서 1년여를 공부했다. 그러더니 어느날 서울로 가는 고속버스를 타고 수지침 강사를 하기 위한 국가고시를 보러 간다고 했다. 이제  갓 스무살이 넘은 젊은이들 틈에 앉아 컴퓨터 용지에 답을 써내려가며 시험을 치른 엄마는 결국 합격 통지서를 받아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걸 손수 증명해 보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10년이 넘게 수지침 강사와 노인 복지사로서, 시 문화센터에서 수지침 강의를 하고, 지역사회 봉사활동도 꾸준히 해오고 있다. 비록 60살이 넘어서야 찾은 새로운 삶이지만 그녀는 결코 늦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은 어느 듯70세가 훌쩍 넘었다. 이처럼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엄마의 모습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젊은 시절의 희생이 있었기에 지금의 시간이 더욱 값져 보인다.        

      세상의 딸들은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나는 엄마처럼 살지 말아야지. 좀더 당당하고 멋지게, 나를 위해 살아야지’라고 말이다. 하지만 엄마가 된 나는 어느새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다. 내 옷을 사기보다는 남편 옷을, 아이들 신발에 눈이 더 가는 것을 보면 어느새 나도 ‘어머니’를 조금씩 닮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여인의 아름다움을 넘어선 이 세상의 어머니, 언제 불러도 가슴 찡한 그리운 이름이다. 자식은 어머니를 때로는 투정의 대상으로, 때로는 무시할 수 있는 대상으로 감히 생각할 때도 있다. 하지만 이와 상관없이 끝없이 사랑을 베푸는 우리의 어머니, 당신의 한없이 넓고 깊은 은혜에 감사할 줄 모르는 우리의 무례함을 용서하시길. 그리고 이제부터는 여자가 아닌‘어머니’의 이름으로 살 수 있는 것에 감사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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