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프랑스 미술은 아카데미즘이 주류였다. 그런데 한 젊은 화가가 1863년 살롱전에 벌거벗은 여인 둘을 그린 그림을 들고 나와서 세상을 놀라게 했다. 바로 너무나도 유명한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 1832-1883)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Dejeuner sur l’herbe’(1863)이다. 이 ‘풀밭 위의 점심식사’에 두 명의 여자가 나온다. 한명은 뒤에서 목욕을 하는 듯 하고 한 명은 옷을 모두 벗은 채 남자들과 수다를 떨고 있다. 옷도 방금 벗은 것이 아니라 옷을 벗고 풀밭 위에서 점심식사를 한 듯 하다.
사람들이 놀란 것은 이 두 여인 때문이었다. 19세기만 해도 누드는 허용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람이 아닌 신이 벗은 몸만 허용했다. 그래서 중세시대 그림들 중 누드 그림들은 다 신들의 누드였다. 그렇기 때문에 1863년에 살롱전에 낙선한 화가들의 그림을 모아 전시한 <낙선전>에 출품된 이 그림은 당시 프랑스 사회를 충격과 분노로 얼룩지게 만들었다. 신화 속의 인물이 아닌 현실 속의 인간을 그린 누드와 관객을 빤히 쳐다보는 발가벗은 여자의 시선은 그때까지 어느 그림에서도 보지 못했던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그림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정면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는 나체의 여성이다. 그녀는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다. 이는 당시 부르주아들의 위선을 풍자하는 시선을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더불어 그림 속 인물들은 실재했던 인물들로 당시 더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매개가 되었다. 현실의 어두운 면을 직접적으로 폭로한 마네는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어두운 면을 생각하게 한다. 마네는 이 작품을 통해 겉으로는 근엄한 척하며 규범 속에 묶여있는 당시 사회 상황을 꼬집고 있다. 19세기 후반 파리는 도시의 재개발 사업으로 인해 술집들이 들어서면서 향락적이고 퇴폐적으로 변해갔다. 당시 파리의 상류층 남자들은 이곳을 드나들며 이중적인 생활을 즐겼다. 그래서 이 그림 속의 여성은 신화에 나오는 성스러운 이미지가 아니라, 실존여성인 고급 매춘부를 모델로 삼았고, 가운데 남자는 차남, 오른쪽은 마네의 동생을 모델로 삼았다.

     마네는 프랑스에서 법관의 아들로 태어나 경제적으로 유복했다. 뚜렷한 예술관과 집념, 현실과 타협하지 않으려는 고집, 자신의 잘못을 고쳐나가려는 열린 자세 등에서 19세기를 빛낸 화가라는 칭송을 들을 만했던 마네는 1863년 프랑스 왕립미술 아카데미가 주최하는 살롱전에 ‘풀밭 위의 점심식사’를 출품했다. 1737년 파리 루브르 궁전의 한 살롱에서 시작된 이 전시회는 신인 미술가의 등용문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기성작가 중심으로 규격화된 심사를 하던 살롱전은 색채의 미묘한 변화 속에 자연을 묘사한 이 이색적 작품을 거부했다. 마네의 작품은 이 해부터 살롱전에서 떨어진 작품들을 따로 모은 낙선전으로 가야 했다. 더구나 살롱전에 출품해서 당선은 커녕 낙선을 하고 그 낙선된 작품만을 따로 모아 전시하는 초라한 전시회에서 그 작품성과 외설성으로 인해 처참한 평을 들어야 했다.
낙선전에 출품된 작품 중 평론가나 일반 대중들로부터 가장 많은 비판을 받은 이 작품은 당시에 유명한 고전으로 취급되었던 조르지오네(Giorgione, 1477-1510)와 티치아노(Titiano Vecellio, 1488-1576)의 합작 <전원의 합주>와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드의 <파리스의 심판>을 참조하여 그렸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명한 고전이라고 평가받는 두 작품과 마네의 작품을 비교하면서 마네의 작품은 당시 엄청난 비난에 직면했다.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는 나체 여성과 옷을 입은 남성을 대비시켜 화제가 되었으며, 벗은 옷 옆에 있는 과일 바구니에서 마네의 정물화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풀밭 위의 점심 식사’는 빛과 어둠을 나타내 인상파 탄생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세월이 흘러 후세사람들은 이 작품을 경외의 눈으로 바라본다. 빛을 주제로서 표현하려 했던 이 작품은 결국 인상주의가 탄생할 수 있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낙선자 미술전시회 이후 마네를 중심으로 한 젊은 화가들이 모여서 인상파를 만들었고, 그때부터 마네는 인상파의 아버지라고 불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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