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성욕이 없는 무성애자라니까. 꼭 섹스를 하고 살아야 돼?”
여자 친구의 끈질긴 요구에 진료실을 찾은 30대 중반의 남성 J씨는 불만과 퉁명스러움이 하늘을 찔렀다. 마른 체격에 다소 예민해 보이는 J씨는 나름 성공한 커리어에, 깔끔하고 흐트러짐 없는 옷차림 등 겉으론 이성에게 매력적으로 어필할 법한 남성이었다. 그는 사실 한번 이혼 경력이 있었다. 성격 차이라고 주장하나 성(性)적인 그늘로 가득했다.
J씨가 주장하는 무성애(asexuality)는 이성이건 동성이건 어떤 대상에도 성적인 끌림이나 성욕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무성애자에 대한 보고는 킨제이 보고서가 처음이다. 미국의 생물학자인 알프레드 킨제이 박사는 연구에 참여한 대상자들을 이성애와 동성애 성향에 따라 등급을 매겼다.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 X등급으로 분류했고, 이들을 무성애자라고 불렀다. 1980년대 스톰즈 박사가 킨제이의 등급을 개정, 성적 기호에 따른 새로운 분류를 제시하면서 무성애에 대한 이론이 확립됐다. 이후 1994년 영국에서 실시된 연구에선 조사 대상자의 1.05%가 무성애자로 분류됐다.
무성애자들은 성욕이나 성적 끌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갖고 싶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일시적으로 성관계를 갖기도 한다. 성적 욕구를 느끼지 못한다는 점에서 무성애는 성욕저하증과 유사해 보인다. 하지만 성욕저하증 환자는 스스로 불편해하는데 비해, 무성애자는 그런 자각증상이 없고 평생 지속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처음엔 너랑 성관계도 했었잖아. 근데 이젠 너한테 매력도 못 느끼고 욕구가 안 생기고 반응도 없는데 어쩌란 말이야?”
J씨는 이렇게 항변한다. 사실 무성애자들은 자신의 감정을 타인과 공유하지 않고 표면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데 그친다. 초기 성관계 외엔 궁극적으론 섹스리스(sexless) 문제로 빠져든다. 그런데 무성애 당사자는 이게 고통이라는 것을 모르거나 부정한다. 배우자 입장에선 깊이 있는 감정 교류와 정서적 유대감 없이 겉돌고, 남과 별 다를 바 없는 거리감에 고통 받는다. 결국 무성애자의 성적 기피는 그의 표면적 인간관계를 대변하는 셈이다.
무성애자의 성적인 기호와 정신건강과의 연관성을 분석한 1983년의 연구는 주목할 만하다. 여기서 무성애자는 자존감이 낮고 더 쉽게 우울증에 빠지는 것으로 드러났으며, 실제 이들이 심리적으로 취약한 부분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학계에선 무성애가 강박증·불안장애·분열성 성격장애·우울증, 과거의 부정적인 성경험에 따른 회피나 혐오반응, 발달장애·성격문제·심리적 거세 같은 정신분석적 갈등에서 비롯되는 증상으로 보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실제 진단을 해보니 J씨는 강박증, 사정이 쉽지 않은 지루와 이에 동반된 성 기피가 있었다. 이전 결혼에서도 이로 인한 섹스리스가 이혼의 큰 원인이었다. J씨처럼 자신의 성욕저하증, 상대와의 갈등, 본인의 심리적 문제, 성기능 문제, 인간관계의 어려움 등에서 도망가기 위한 또 다른 방패막이로 무성애를 끌어들이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스스로 무성애자라며 섹스리스를 정당화하려는 상당수는 바로 치료를 받아야할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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