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열 두 제자 중에 ‘마태’라는 사람이 있다. 그의 이름 앞에는 ‘세리’란 이름이 따라 다닌다(마10: 3). 세리는 당시 유대 사회에서 민족의 반역자 취급을 받던 사람들이었다. 당시 그들은 로마제국의 하수인 역할을 하며 세금을 착복하여 자기 부를 채우던 자들이었기에 세리는 늘 죄인 취급을 받았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이란 마을을 지나가시다가 세관에서 일을 하고 있던 마태란 사람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부르셨다. 그 부름에 감격했던 마태는 예수와 그를 따르던 몇몇 사람들을 자기 집으로 초대했다. 그리고 자기의 동료들과 가난한 이웃들을 초대하여 함께 음식을 나누게 되었다. 이 장면을 목격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세리와 죄인들과 같이 식사를 한다고 예수를 비난한다. 그들의 비난을 들은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란 유명한 말씀을 남기셨다. 그리고 “종교적 의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셨다. 공관복음서에 이 이야기가 전승되지만 마태만 전하는 이야기가 있다.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호6:6 참조)는 말씀을 예수의 말씀으로 추가했다는 것이다.

        세리마태는 마태복음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그가 전하고자 했던 것은 “사람을 긍휼히 여기지 못하는 종교인들을 지적하면서 율법이나 종교행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을 긍휼히 여겨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오랜 세월 사람들에게 사람대접 받지 못하던 세리 마태, 그는 소외된 자들의 친구가 되어주셨던 예수를 따름에 있어 조금의 주저함도 없었을 것이다.
8월 14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방문한다. 가톨릭뿐만이 아니라 한국사회가 열광적으로 교황을 환영하고 있다. 왜 그런가? 그분의 이름 앞에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벗”이란 또 다른 이름이 따라 다니기 때문일 것이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 예수님의 사역이었기에 그의 모습이 진정 예수를 따르는 사제의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보이고 있다. 그가 교황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고국 아르헨티나에서부터 청빈한 생활을 하며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벗으로 살아왔다고 한다. 교황이 된 후에도 바티칸의 교황 전용 관저대신 다른 사제들과 함께 게스트 하우스에서 지내며 교황 전용자동차 대신 버스를 타고 다닌다고 한다. 한국방문 중에도 정부에서 제공하는 최고의 의전과 경호를 받으며 고급 리무진을 탈 수도 있지만, 1600cc급 기아자동차의 쏘울이라는 작은 자동차를 탄다고 한다. 자기를 낮추는 교황의 모습이 파격적인 것이 아니라, 그 겸손함이 바로 평상시의 그의 삶의 모습이라 하기에 세계인들의 존경심과 관심을 받고 있는 것이다.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는 모습이 아름답다.

        광복69주년, 8.15 해방절에 판문점을 방문하여 분단된 한반도의 평화통일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고 기도했으면 더 큰 의미를 전 세계에 전할 수 있을 터인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명동성당에서라도 한반도의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를 드리며 세계 유일의 분단국인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메시지를 전한다 하니 그 또한 의미 있는 미사가 될 것이라 여겨진다. 하여간 우리 모두에게 예수의 삶과 말씀을 실천하려는 노력이 절실하게 필요한 때이다. 가톨릭이 어쩌니 개신교가 어쩌니 하는 것 보다 예수의 말씀과 삶과 정신을 실천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다시 살펴보고 겸손하게 낮은 자리에 더 다가가는 삶이 되어야 한다. 마태가 전해 준 예수님의 말씀처럼 사람을 먼저 긍휼히 여기며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벗이 되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낮은 곳을 향하는 삶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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