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평화를 갈구한다. 치열한 생존 경쟁의 장인 밖으로 내몰려 하루를 보낸 후 지친 몸을 이끌고 집안으로 들어왔을 때 내게 평화를 줄 수 있는 매개체를 갈구한다.
푸른 풀과 흐드러지게 핀 꽃들 사이로 생명의 홍일점이 되어 움직이는 생명체가 있다. 한가로이, 아무 계획이나 의도없이 움직이고 있는 이 생명체는 붉은 심장을 닮은 금붕어들이다. 비싼 관상용 물고기가 아니라, 그저 흔하디 흔한 금붕어들이다. 작은 어항임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자유로움. 이 금붕어들이 가진 따스함과 자유로운 삶이 부러워진다. 빨간 금붕어들이 거주하는 저 물 속에 내 삶을 풀어버리면 삶에 청량감이 깃들 것만 같다.

      맥놓고 앉아 금붕어를 바라볼 수 있는 나의 한가로운 시간. 열쇠꾸러미 뭉치처럼 짤랑거리며 흘러가는 내 분주한 삶의 시간이 짤랑거리기를 멈추고, 엉킨 매듭 같은 시간이 저 금붕어를 바라보고 있자니 풀려진다. 금붕어를 통해 드디어 나는 ‘한가로움’을 소유할 수 있게 된다. 그 옆에는 ‘평화’가 같이 따라온다. 한가로움과 움직임이 있는 생명체, 이것이 마티스의 그림을 매력적이게 한다.
헨리 마티스의 (Henri Matisse) <금붕어(The Goldfish)>는 격렬한 원색과 시원스런 붓놀림, 음영을 포기한 쾌활함으로 유명한 작가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야수파 화가인 마티스의 그림들 중에 가장 투명하고 박은 그림임에도 불구하고 정물화 답지 않게 검은색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금붕어는 17세기에 동아시아에서 유럽에 처음 전해졌는데, 1912년부터 금붕어는 마티스가 꾸준히 그림을 그리는 소재가 되었다. 마티스는 총 9점의 그림에 금붕어를 소재로 했다. 그러나 이 작품은 금붕어를 주제로 한 다른 작품과 비교해 금붕어를 그림 중앙에 배치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마티스의 <금붕어>는 보는 이들의 시선을 단번에 제압할 수 있는 화려한 색상을 가졌다. 밝은 오렌지색은 어항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분홍색과 초록색과 대비되면서 더 선명한 오렌지색 효과를 내고 있다. 이러한 기법은 마티스가 속한 야수파에서 집중적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특히 마티스의 초기 작품에서 더 자주 볼 수 있다. 색채를 자유자재로 사용해 색채의 대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는 마티스는 “캔버스라는 나만의 공간 속에 표현되는 모든 색조는 마치 음악의 화음과 같고, 살아있는 색의 어울림으로 연주되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마티스는 평생 가난하게 살아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고 싶어 주위의 걱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행복하게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그림을 그리다 보니 그의 그림에는 남과 다른 그만의 특징이 잘 살아난다. 그러나 전통적인 스타일과는 너무 다른, 어찌 보면 파괴적일 정도로 자유분방해 보이는 그의 그림을 당시의 미술애호가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림이 팔리지 않으니 당연히 생활고에 시달릴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마티스는 개의치 않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고수해나갔고, <금붕어>는 그렇게 자신이 느낀 대로, 좋아하는 대로 색을 구사해 그린 그림이다. 어린 아이가 그린 듯 형태를 단순하게 표현한 뒤 신선한 색채를 마음껏 칠했다.
이처럼 자유로운 색채의 구사가 얼핏 초보적으로 보이나 볼수록 강렬한 쾌감을 느끼게 하는 것은 이 색채들이 빛과 그림자의 법칙이나 복잡한 기교로부터 해방돼 순수한 에너지를 발산하기 때문이다. 이런 표현은 나중에 야수파로 알려지면서 마티스를 당대의 선구자로 만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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