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d you 이빨 닦어?” 얼마전 큰 아이가 작은 아이에게 던진 말이다. 너 이빨 닦았느냐 라는 말을 영어와 한글을 섞어서 사용한 것이다. 그래도 자기들끼리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는다. 어이가 없었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니 생활속에서 이런 경우가 허다하다. 미국에서 태어난 한인 아이들은 일상 대화 중에 반은 한국어, 나머지 반은 영어로 말하는 일에 익숙해져 있다. 그러다 차츰 영어를 더 많이 쓰게 되면서 결국은 한국어를 사용하는 것이 불편해진다.

     그러나 미국도 아닌 한국의 영어 남용 행태는 더 가관이다. 특히 스포츠계는 더 심하다. 얼마전 2014년 프로야구 캐치프레이즈(구호)를  ‘올웨이스 비 위드 유(always B with you)’라고 정했다는 뉴스를 본적이 있다. ‘항상 그대 곁에 야구가 있다’라는 의미지만 한글을 쓰지 않고 영어로만 구성했다. 하지만 한국의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문구를 영어로 적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1982년 프로야구 원년에 ‘어린이에게 꿈을’이라는 구호로 명확하게 뜻이 전달됐던 것과 비교하면 아쉽기만 하다. 야구뿐만이 아니다. 스포츠 종목 대부분이 외국에서 들어온 터라 딱히 한글로 바꾸기 애매한 경기 규칙이나 용어 등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굳이 외국어를 사용할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 무분별하게 사용되는 ‘꼬부랑말’은 듣는 사람의 짜증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대한축구협회는 지난 4월 ‘리스펙트 캠페인(Respect Campaign)’ 선포식을 열었다. 선수, 지도자, 심판, 관중 등 축구를 둘러싼 모든 구성원이 서로를 존중해 올바른 축구 문화를 정립하자는 취지다. 하지만 리스펙트라는 단어를 모르면 뜻이 통하지 않는다. 프로축구 역시 지난해부터 팬과 소통하자는 의미에서 ‘Talk about K LEAGUE’(토크 어바웃 K리그)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지만 영어를 모르면 소통 자체가 어려운 말이 되고 말았다. 2년전 ‘열정 놀이터’라는 한글 구호를 썼던 것을 떠올리면 아쉬움이 남는다.

     프로구단들의 외국어 남용은 더 심각하다. 프로야구 삼성 라이온즈도 구호를 ‘투게더, 리:스타트! 비 레전드!’(Together, RE:Start! BE Legend!)로 정했다. 최근 3년간 삼성은 ‘예스, 위 캔!(Yes, We Can!)’, ‘예스, 원 모어 타임!(Yes, One More Time!)’, ‘예스, 킵 고잉!(Yes, Keep Going!)’등 영어만으로 구호를 정하는 뚝심을 발휘했다. 또 기아 타이거즈가 사용하는 ‘All new Stadium! All New KIA TIGERS!’도 난해하기는 마찬가지다. 부천FC도 ‘보다 나은 방향으로 전진하자’라는 의미로 ‘Move Forward’를 쓰고 있다.
세계화의 흐름일까, 아니면 단순히 멋있어 보이기 위함일까. 훈민정음 반포 568돌을 맞는 한글날을 맞아 무분별하게 퍼져 있는 외국어들을 바라보는 마음은 무겁기만 하다. 대한민국 부모들의 지나친 학구열은 가나다보다 ABC를 먼저 배우게 하고, 한국말도 못하는 세살배기 아이에게 영어 만화영화만 줄기차게 보여주고 있다. 한 달에 150만원이 넘는 영어 유치원은 일찌감치 등록이 마감된다. 공문서, 도로 표지판, 유적지 표석 등에도 틀린 글자가 심심찮게 눈에 띈다. 특히 인터넷이나 모바일에서의 언어 파괴 현상은 심각하다. 신조어가 난무하고 이모티콘, 줄임말 등이 유행처럼 번지면서 문법상 잘못된 표현, 틀린 맞춤법이 예사로 사용되고 있다. 청소년들의 욕설, 은어, 비속어 사용은 도를 넘어섰다. 하물며 대통령의 국정연설에서도 뜻을 감지하기가 모호한 영어가 숱하게 등장하고 있는게 현실이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에 한글은 문자학적 가치가 더욱 돋보인다. 얼마 전 휴대전화 문자 입력에서 각자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외국인 60명을 대상으로 동일한 조건에서 공통된 뜻을 가진 문자 내용을 누가 더 빨리 입력할 수 있는가에 대한 실험이 진행됐다. 결과 한글은 영문과 일문보다 더 빠른 입력 형태로 나타났다. 이는 한글 창제의 제자 원리와 관련이 깊다.
이처럼 한글은 문화적, 과학적 가치를 지닌 우수한 문자다. 찬란했던 조선 문화의 상징이며 민족적 자긍심의 원천이다. 창제자와 창제 이유를 아는 세계 유일한 문자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유로 훈민정음 해례본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이처럼 세계가 인정한 한글이지만 정작 한국인의 한글 사랑은 그다지 깊지 않다. 그러나 이곳 미국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가르치려는 열정은 식지 않고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나이로 대충 나눠지는 비체계적인 반 분류나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교사와 교과서의 부재, 그리고 부족한 재정 등은 이민사회의 한국학교가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로 지목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뛰는 교사들이 있기에 한국어의 미래를 밝다.

     많은 한인 부모들은 자녀가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면 영어를 걱정한다. 필자도 아이의 학년이 높아지면서 영어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꿋꿋하게 한국어로 일기를 쓰고 한국 동화책으로 읽기와 쓰기를 가르쳤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이의 영어 읽기, 쓰기 성적은 영어만 사용하는 다른 미국 아이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꾸준한 한글교육이 결코 영어 성적을 떨어뜨리지 않는다는 점은 알아둘 필요가 있다. 
이제 영어만 잘하는 아이들이 잘나 보이는 시대는 지났다. 오히려 한국인이 한국말을 하지 못하는 것이 더욱 부끄러워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미국인들도 모국어를 하지 못하고 영어만 하는 2세들을 ‘바나나’라고 비아냥거린다. 외모는 동양인인데 속은 백인인 아이들의 모습을 바나나에 비유하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그러한 모욕을 감내하며 살아가지 않도록 이 미국땅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것은 부모들의 몫임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한국말을 해야 한국식의 사고를 공유할 수 있다. 또 자녀들에게 한국말을 가르치는 일은 부모와의 절대 공감을 형성하는 일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글을 못 읽은 국민들을‘어엿비’여겨 한글을 창제했던 세종대왕의 깊고 높은 뜻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는 오늘은 한글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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