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살았던 내 고향 산천은 겹겹이 산으로 둘러쳐진 첩첩산중이었습니다. 여름 동안 한없이 푸르던 그 산들이 온통 알록달록 화려한 단풍으로 옷을 갈아입을 때면 우리는 온 산을 헤집고 다니며 머루, 다래를 따먹고, 도토리와 산밤 줍는 재미에 취해 해지는 줄을 몰랐습니다. 발이 푹푹 빠질 정도로 겹겹이 떨어져 쌓여 있는 낙엽을 헤치며 도토리를 줍다가 허리를 펴고 영롱한 빛깔로 물든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을 쳐다보노라면 아득한 몽롱함을 느끼게 하는 현기증이 오곤 했지요. 이 가을에 그 빛깔, 그 햇살이 한없이 그리워집니다.
도종한 님의 시 중에 ‘단풍 드는 날’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아는 순간부터 /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 제 삶의 이유였던 것, / 제 몸의 전부였던 것, /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 방하착(放下着) / 제가 키워온, / 그러나 이제는 무거워진 / 제 몸 하나씩 내려놓으면서 / 가장 황홀한 빛깔로 / 우리도 물이 드는 날”

      이 시에서 시인은 나무의 절정을 ‘단풍 드는 날’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해 동안 초록을 자랑하며 치열하게 살아왔던 ‘제 몸’, 즉 이파리를 단풍으로, 황홀한 빛깔로 물들여 낙엽지게 하는 것을 ‘방하착(放下着)’이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방하착(放下着)’이라는 말은 불교에서 자주 쓰는 용어로, ‘손을 아래로 내려놓는다.’라는 뜻입니다. 나무에게 있어서 아름다운 빛깔로 물든 단풍의 의미는 치열하게 살아 왔던 초록으로의 삶을 잠시 멈추고 버려야 할 것들을 과감히 버리며 자신을 내려놓는 순간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불어 닥칠 북풍의 그 차갑디 차가운 눈보라를 온 몸으로 이겨낼 준비를 하는 것이겠지요. 나무가 푸른 초록이 너무 좋아서 그 무성한 이파리를 달고 추운 겨울을 맞이한다면 그 나무는 그 긴 겨울의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얼어 죽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나무는 겨울 전에 자기를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자연의 섭리인 단풍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한낮 미물인 단풍들어 떨어지는 낙엽 하나를 바라보면서도 인생의 의미를 찾아내는 시인의 마음이 부럽고 또 부럽습니다.

       우리 인생에서도 추운 겨울이 찾아 올 때가 있습니다. 삭풍을 맞으며 광야 한 복판에 서서 가야 할 길을 몰라 한숨 짓는 영적인 겨울을 맞이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들 이민생활이 그렇지요. 그렇게 길지 않은 이민생활이지만 광야와 같았던 삶의 터널들을 통과하면서 소중하게 배운 것은 ‘내려놓음’이었습니다. ‘버림’이었습니다. 내가 발버둥 치면 칠수록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내동댕이쳐졌습니다. 움켜쥐려고 하면 할수록 소멸되고 있었습니다. 어느 순간 이제는 더 이상 내 힘으로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생각에 버둥거림을 멈추고 ‘이제 하나님이 하십시오!’라고 나를 내려놓는 순간, 칠흑같이 어두운 터널 끝에서부터 다가오는 환한 빛을 보았습니다.

      참 오래 전에 읽었던 몽골 선교사 이용규님이 쓴 책 <내려놓음>을 다시 꺼내 들었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내려놓음’이란 나를 비우고 하나님으로 채우는 삶의 결단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하나님이 내려놓으라고 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내려놓을 때 비로소 그것이 진짜 내 것이 되기 때문이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아들 동연의 어릴 적 이야기를 하지요. “아들 동연이가 두 살 때 함께 장난감 가게에 간 일이 있다. 동연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버즈 장난감을 두 팔로 꼭 움켜 쥔 채 가게를 나오려고 했다. 그러나 장난감을 가지기 위해서는 그것을 계산대에 올려 점원이 바코드 판독기로 읽게 해야 했다. 그래서 점원이 동연이의 팔에서 장난감을 넘겨받으려고 했을 때, 동연이는 울며 장난감을 꼭 쥔 채 내려놓으려 하지 않았다. 장난감이 진정한 자기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잠시 계산대에 그것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결국 동연이는 장난감을 안은 채로 계산대 위에 올라 가야 했다.” 그러면서 저자는 이렇게 결론을 맺습니다. “진정 내 것을 얻으려면 내려놓아야 한다!” 고 말입니다.
오늘 나도 새삼스럽게 노랗게 물들어 떨어진 낙엽 하나를 손에 들고 나도 모르게 어느 순간 내 것인 양 그것이 나의 전부인 양 움켜쥐고 있는 것들, 그래서 그것들로 인해 인생의 어깨가 짓 눌려 아파하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그러면서 시인처럼 아낌없이 버리려야 할 것을 버리고, 내려놓아야 할 것들은 내려놓기로 결심해 봅니다. 그리고 ‘가장 황홀한 빛깔로 나도 물드는 그 날’을 기대해 봅니다. 내 힘으로 물들인 그 날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고 하나님이 이루어 내신 것들로 물들어진 그 날을 바라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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