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권위의 상이라고 불리는 노벨상은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고 이를 기업화해 거부가 된 알프레드 노벨(Alfred B. Nobel)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는 1895년 11월 27일 유언장을 통해, ‘인류복지에 가장 구체적으로 공헌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그의 유산 약 3100만 크로네를 스웨덴의 왕립과학아카데미에 기부하였다. 이 유산을 기금으로 하여 노벨재단을 설립해 1901년부터 물리, 화학, 생리 의학, 문학 및 평화, 경제학 등 6개 부문으로 나누어 시상하고 있다. 상금은 한 부문당 한화 약 12억원 정도로 알려져 있다.
올해 노벨상 수상자가 13일 경제학상 수상자 발표로 마무리됐다. 하지만 한국은 올해도 노벨상과는 인연을 맺지 못했다. 혹시나 하는 기대가 ‘역시나’로 끝났다.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돼온 시인 고은(高銀)은 올해도 그 영광이 비껴갔다. 한국인 최초 노벨 화학상 수상자 유력 후보로 거론된 유룡 기초과학연구원(IBS) 단장 겸 카이스트 특훈교수의 화학상 수상도 불발로 끝났다. 이에 반해 일본인 과학자 3명이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로 선정되면서 일본의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는 19명을 헤아리게 됐다. 자만하는 많은 한국인들에게 ‘19대 0’의 충격과 자조를 안긴 셈이다. 지금 한국에서는 ‘일본은 하는데 왜 우리는 못하느냐’라는 자탄이 쏟아지고 있다. 한국은 1901년 노벨상 시상이 시작된 이후 2000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비과학 분야인 평화상을 수상하면서 간신히 이름만 올린 처지다.

     일본이 2000년 이후 노벨 과학상 분야에서 미국, 영국과 함께 세계 3강을 구축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국가차원에서 기초과학기술 개발에 대한 지속적인 투자에다 해외 우수기술 활용을 위한 국제공동 연구도 활발히 펼치고 있다. 역대 수상자에 도쿄대, 교토대 등 명문대는 물론, 지방대 출신도 다수 포함된 것은 일본 기초과학의 저변이 그만큼 넓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너도나도 인기 분야에만 매달리며 연구비를 쪼개 갖는 연구풍토에서 일본식 한 우물파기는 대한민국에서 불가능하다는 한 과학자의 실토가 우리를 더욱 우울하게 만든다.

     그러나 인정할건 해야 한다. 10년 넘게 노벨상을 휩쓰는 일본 과학계의 저력이 놀랍다. 이번에 물리학상을 받은 청색 발광다이오드(LED)는 적색, 녹색에 더하여 빛의 삼원색을 완성시켰다. 이 삼원색 LED를 응용한 제품으로 대형 전광판을 들 수 있다. 처음 디지털 카메라가 나왔을 때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잘 몰랐다. 디카는 세상을 바꿨고 그 결과 디카 발명자 2명은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처음에 광섬유가 소개되었을 때는 빛 신호가 단 몇 미터 밖에 못 갔다. 지금은 광섬유가 통신의 중추로서 광섬유가 없으면 세상의 신경이 끊긴다. 딱 한편의 논문을 썼던 광섬유 개발자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이처럼 노벨상을 받으려면 그것이 인류 생활을 변화시킬 정도로 영향을 미쳐야 한다.
하지만 영국의 유명한 물리학자인 호킹 박사도 노벨상을 못 받았다. 그의 학설이 확실히 학문적 발전단계를 끌어 올려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고, 또 하나는 학설은 반드시 실험이나 관측으로 증명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하트만 간디도 1937, 1938, 1939, 1947년에 평화상 후보에 올랐으나 노르웨이 노벨위원회가 영국의 눈치를 보느라고 지명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인도 독립 후인 1948년 지명이 당연시되었지만 간디는 그 해 1월에 서거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특정 종교 수장이라는 점과 반공주의 활동을 펼친 게 걸림돌로 작용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철강왕’ 앤드류 카네기는 반노조 성향이, 존 F케네디 전 대통령은 베트남전쟁 개전이 발목을 잡았다.

     그러나 상의 가치와 기준은 시대에 따라 변하고 있다. 이제는‘이그노벨상’(Ig Nobel Prize)의 시대라는 말도 있다. 매년 10월 초순 그 해의 노벨상 수상자가 알려질 무렵, 하버드대학의 샌더즈 극장에서 열리는 시상식 하나가 꽤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 시상 부문에는 노벨상 대상인 물리학, 화학, 의학, 문학, 평화 외에 공공의료, 공학, 학제간 연구 등의 여러 부문이 있다. 1991년‘명랑과학’ 잡지를 표방하는 <황당 연구 연대기>(Annals of Improbable Researches) 편집자 마크 에이브러햄스가 창설한 이 상은 노벨상 수상자들이 나서서 시상식 진행을 맡아줄 만큼 큰 호응을 얻으며 해마다 많은 웃음을 과학계에 선사하고 있다. 고귀하다는 뜻의‘noble’에‘ig’를 붙여 반대말을 만드는데 빗대 ‘Nobel’에 ‘Ig’를 붙인 것은 물론 노벨상에 대한 패러디다. 하지만 날선 비판이 아니라 부드러운 풍자의 분위기다. 야유는 언제나 환영이다. 무대를 향해 종이비행기를 날리도록 객석에 종이도 준비해둔다. 수상 기준을 초기에는“이루어질 수도 없고 이루어져서도 안 될” 연구로 제시했지만 근래에는“사람들을 처음에는 웃게 만들고, 이어서 생각하게 만드는” 연구로 바뀌었다. 1995년 평화상을“정치인들이 서로 치고 차고 때리는 것이 다른 나라와 전쟁을 하는 것보다 생산적인 행동이라는 사실을 입증한 공로”로 타이완 의회에 수여한 것을 시작으로 한국인으로는 1999년 환경보호상을 코롱사의 권현호씨가 받은 것이 눈에 띈다. 향수를 따로 뿌릴 필요가 없는 신사복을 발명한 공로였다. 이그노벨상과 노벨상을 모두 받은 과학자는 러시아 출신으로 네덜란드와 영국에서 연구활동을 해온 안드레 가임 한 사람뿐이다. 그는 2007년 이후 주요 과학상을 휩쓸다가 2010년 노벨 물리학상까지 받았지만, 수상 경력의 첫머리에는 항상 2000년의 이그노벨상을 올려놓는다. 전자기 부양효과 연구 실험에서 하필 개구리를 공중부양시킨 것이 이그노벨상 수상 자격이 되었다. 노벨상을 받은 후 그는 “솔직히 말해서 저는 이그노벨상과 노벨상에 똑같은 가치를 둡니다. 이그노벨상은 제가 농담거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었습니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단지 유명하다고 해서 노벨상을 주지 않는다. 노벨상을 받아야만 최고가 되는 것도 아니다. 1964년 사르트르가 노벨 문학상 수상을 거부하며“노벨상은 작가정신을 제도 속에 옭아 넣는다”고 비판한 것은 바로 노벨상의 이런 획일적인 면을 지적한 것이다. 노벨상은 욕심만 낸다고,‘내 아이 노벨상 수상자로 키우기’처럼 무슨 입시 준비하듯 화려하게 스펙을 쌓고, 국가가 운명을를 건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한 노벨상 수상자는“유행하는 연구에 매달리지 말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최고”라고 겸손히 말했다. 이것이 만고의 진리다.  
저작권자 © 주간포커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