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믿는다는 것이 그리 편치 않은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거짓이 난무하고 어떤 사건에 대하여 실체적 진실에 접근이 불가능한 사회는 비극입니다. 오늘 우리의 비극은 음모론과 거리를 둘 수 없는 사회에 살고 있다는 점입니다. 지금 상영 중에 있는 놀란 감독이 만든 영화 ‘인터스텔라’ 초반부에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식량난에 허덕이는 시대에 아이들로 하여금 대학에 못 가게하고 농부가 되게 하기 위해 학교에서 아폴로 우주선이 달에 착륙한 사건을 냉전시대에 미국이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만들어낸 사기극이라고 가르치는 웃지 못 할 장면이 나옵니다. 음모론이 설득력을 갖는 사회는 정상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을 믿는다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믿는다.’는 것보다 ‘믿어준다.’는 쪽이 더 편할지 모르겠습니다.
믿음과 신뢰의 결핍은 사랑의 결핍에서 기인합니다. ‘사랑장’이라는 별칭이 붙은 신약 성경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도 바울 선생님은 “사랑은 모든 것을 믿으며...”라고 사랑을 정의하고 있습니다. 어떤 주경학자는 이 ‘믿는다’는 말을 ‘이웃에게 속을 줄을 알면서도 그에 대해 긍정적인 신뢰를 포기하지 않는 믿음’이라고 해석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를 사랑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신뢰를 주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면 믿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믿게 하고, ‘미움’은 모든 것을 의심하고 불신하게 만듭니다. 사랑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최선을 생각하지만, 미움은 최선의 상황에서도 최악을 생각합니다. 

     사랑은 끝까지 믿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면 이것이 가능합니다. 음악을 가장 잘 감상하는 방법은 작곡가가 곡을 만들 때 떠오른 영감에 동참하고 연주자들이 최선을 다해 연주하고 있다고 믿으며 듣는 것입니다. 그림을 가장 잘 감상하는 방법은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 어떤 작은 것도 놓치지 않고 손길 하나하나에 자신의 모든 재능과 정성을 기울였다고 믿고 보는 것입니다. 책을 읽을 때 가장 좋은 독서법은 글을 쓴 사람이 이 글을 쓰기 위해 겪은 경험과 갈등, 한 단어 한 문장을 끝까지 붙들고 씨름한 모습을 상상하며 읽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만날 때 그 사람과 가장 빨리 친해지는 방법은 그 사람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삶을 귀하고 아름답게 회상하고 꿈꾸면서 만나는 것입니다. 공부를 할 때 가장 잘 할 수 있는 방법은 모든 문제들이 각각 의미가 있고 그것들이 실제적으로 내 삶에 도움이 된다고 믿고 대하는 것입니다. 여행을 할 때 가장 즐겁게 여행하는 방법은 그곳의 풍경과 사람들을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며 그들이 살아온 역사가 참으로 귀하다고 믿고 대면하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가장 행복해 지는 방법은 그가 어떤 환경에 처해 있더라도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사랑 외에는 아무 이유도 찾지 않고 그냥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것은 의심하면 쓰러지고 믿으면 일어섭니다.

     몇 일전에 글 서두에서 언급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만든 영화 ‘인터스텔라’를 보았습니다. 역시 무엇인가 메세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놀란 감독의 천재적인 감수성이 돋보이는 영화였습니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일반인들은 이해하기도 힘들고 경험할 수도 없는 천체 물리학을 소재로 만든 영화이기에 과연 공감이 가능할까? 말도 안 돼! 하며 표 값이 아깝지 않을까를 염려했는데 기우였습니다. 이 영화를 통해 놀란 감독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사랑’이었습니다. 물리학이라는 조금은 황당하고 딱딱할 수 있는 소재에 ‘사랑’이라는 옷을 입혔습니다. 거의 3시간 동안 내내 펼쳐지는 영화의 한 장면 한 장면 속에 사랑이라는 주제가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물리학적으로도 아직은 설명이 불가능하지만 영화적 허용 때문에 가능했을 황당한 장면들이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감동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사랑은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사랑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딸에게 다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하고 먼 우주로 떠났다가 구사일생으로 다시 딸에게로 돌아온 사이에 중력방정식에 의한 행성 간(Interstellar)의 시간지연으로 인해 딸은 자기보다 80여년 이상이나 더 늙어버린 모습이었습니다. 이제 너무 늙어버려서 임종직전에 있는 딸을 병실에서 만나는 애틋한 장면이 영화 끝 부분에 나옵니다. 오랜 세월의 기다림 끝에 만난 딸이 아빠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빠가 돌아올 것을 모든 사람들이 믿지 않았지만 나는 믿었어요. 왜냐하면 아빠가 나에게 약속했기 때문이에요.” 딸은 자기가 그토록 좋아하고 사랑하는 아빠의 약속이기 때문에 믿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생명을 내놓아도 아깝지 않을 사랑하는 딸과의 약속이기에 생사를 넘어 딸 곁으로 돌아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약속을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시면서 하신 약속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한복음 14:2-3) 이 약속을 하고 떠나신지 2000년이 지나가고 있지만 오늘도 저는 이 약속을 믿고 우리 곁으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립니다. 왜냐하면 나를 너무나도 사랑하셔서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어 놓으신 그분, 나를 정말 사랑하신 그 분이 하신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한복음 14:1)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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