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병일 한인기독교회 담임목사  

   한 동안 ‘웰빙’(Well-being)이라는 말이 유행했었다. 생활수준의 높낮이를 목표로 삼던 한국 사회가 삶의 질을 높이는데 지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건강에 좋다는 제품에는 ‘웰빙’이라는 수식어 붙지 않은 것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요즈음에는 ‘웰빙’을 넘어 ‘힐링’(Healing)이 그 자리를 대치하고 있다. ‘힐링 서적’ ‘힐링 콘서트’ ‘힐링 캠프’ ‘힐링 푸드’ ‘힐링 여행’ 등 사회 전반에 걸쳐 ‘힐링’이라는 말이 넘쳐나고 있다. 이제 미국이든 한국이든 대부분의 선진사회에서는 경증 우울증은 정신질환 범주에도 들어가지 않게 되었다.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가벼운 정신질환은 누구에게나 있는 감기 정도로 판단하는 것이다. 전보다 먹고 사는 문제에서는 자유로워진 반면 외로움, 마음의 고통, 상처, 분노는 점점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추세가 이렇다 보니 자연스레 치유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과거보다 모든 것이 쉽고 편리해졌다. 요즈음에는 교회 사역을 하면서 우표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 모든 일을 컴퓨터를 가지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있다. 손안에 든 작은 전화기를 가지고 못하는 것이 없다. 쇼핑은 물론 이메일을 주고 받을 수 있고,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과 문자를 주고 받기도 한다. 심지어 자동차의 시동도 걸고, 문을 걸고 잠그기도 한다. 운영하는 가게에 도둑이 들어왔는지도 감시할 수 있다. 세계에서 벌어지는 뉴스들도 시시각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불과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들이 우리 눈 앞에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세상이 참 편리해졌다. 직접 만나서 문제를 해결하지 않아도 책상에 앉아서 얼마든지 처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데 편리함은 있지만 상처와 아픔은 더 많아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을 때 참고 기다리지를 못한다. 사람과의 관계는 더욱 힘들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세대는 조용하게 살지를 못한다. 주변이 항상 시끄럽다. 과거에는 알 필요도 없는 세상의 온갖 사건 사고들이 우리 눈과 귀를 쉬지 못하게 하고 있다. 요즈음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심각하게 부족하다. 옛날에는 아무 일도 없이 멍하게 있는 시간도 많았다. 출퇴근하는 버스 안에서 잠을 자기도 하고 아무 생각 없이 한 두 시간을 보냈다. 처음 미국에 와서도 목회를 시작할 때는 도서관을 참 많이 갔었다. 미국 교회를 빌려서 예배를 드리다 보니 사무실이 따로 없었기 때문이다. 성경을 읽기 위해서도 도서관에 갔다. 그때는 한 번 앉으면 두 세시간은 성경을 읽을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참 은혜스럽고 감동이 되는 시간이었다. 차를 몰고 다녀도 라디오만 듣지 않는다면 고요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존재’할 수 있는 그런 텅 빈 시간들이 많았다. 그런 시간 속에서 지난 날을 돌아보기도 하고 미래를 꿈꾸기도 했다. 내가 지금 가고 있는 길이 후회가 없는 길인지도 점검해 보곤 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시간이 없다. 내 손에 들려 있는 작은 스마트폰이 내 시간을 가로채 간다. 사무실 책상에 앉아 있어도 컴퓨터 화면은 언제나 켜져 있다. 손은 습관적으로 언제나 자판을 두드린다. 머릿속의 생각을 정리하는 대신에 이메일을 정리하는 것이 우리들의 현실적인 모습이다. 일기를 쓰고, 편지를 쓰는 대신에 페이스북에 하루 일과를 남기고 있다. 일기를 쓰면서 하루를 정리할 수 있었다. 편지를 쓰면서 그리움을 가슴에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책장을 넘기는 대신에 손가락으로 화면을 넘기면서 하루를 보낸다. 나는 아직도 종이책 냄새가 그립다. 때로는 침을 묻혀가며, 줄을 그어가며 읽는 책이 훨씬 더 감동이 된다. 하지만 손가락으로 화면을 넘기다 보면 감동보다는 정보의 홍수에만 매몰되어 가는 것 같다. 생각하고 고민하고 꿈을 키우기보다는 알 필요도 없고 알아서도 안 되는 수많은 정보들이 내 마음과 생각을 차지해 버리고 만다. 그렇게 내 시간은 사라져가고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도 줄어가고 있다.
   사막에는 ‘프슈프슈’(le feche-feche)라고 불리는 모래의 늪이 있다. 프슈프슈는 사막의 미세한 가루모래로 이루어진 웅덩이다. 여기에 자동차가 빠지게 되면 액셀레이터를 밟고 빠져 나오려고 하면 할수록 차는 더욱 깊이 모래 웅덩이로 빠져 들어가고 만다. 이런 상황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방법은 먼저 타이어에서 공기를 조금 뺀 후 천천히 움직이는 것이다. 모래에 갇힌 자동차 타이어에서 바람을 빼면 바퀴의 닿는 표면적이 넓어져서 차가 빠져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의 문제는 몰라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너무 많이 알아서 힘들어진 것이다. 내가 누군지는 볼 시간도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아는 것을 내가 모르면 낙오자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안을 먼저 들여다 보아야 한다. 내 인생의 타이어에서 바람을 먼저 빼야 한다. 달리는 속력을 조금 늦출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그 동안 안 보이던 것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힘든 문제가 무엇인지, 요즈음 왜 내가 아픈지, 왜 마음에 기쁨이 없고 우울한 지를 직접 들여다 보아야 한다. 내가 나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데 누가 나에게 신경을 써 주겠는가? 나도 내가 가진 문제를 잘 모르는데 누가 나를 치유해 주겠는가? 컴퓨터도, 스마트폰도 하루에 한 두 시간은 전원을 꺼 놓을 수 있어야 한다. 이 모든 현대 문명의 발명품들은 우리를 편하게는 하지만 내 자신을 돌아보게는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일을 하기보다 내 자신을 먼저 들여다 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냥 내 존재 자체를 바라보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그 순간이 진정 내가 치유되고 회복되는 힐링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주간포커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