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이민을 와서 운전면허 시험을 보고 면허증을 받으러 갔을 때다. 운전국의 직원이 대뜸 장기 기증을 하겠냐고 물었다. 한국에서 온지 한 달도 되지 않은 필자에게는 너무나 낯선 말이었다. 지금도 한국에서는 장기 기증에 대한 인식이 이 곳 만큼 확산되어 있지 않다.
우리나라는 유교 사상이 강해 부모의 시신을 훼손하면 불효라고 느끼는 유가족이 많다. 특히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라는 공자 말씀이 중고등학교 윤리와 한자시간에 자주 나오다 보니 지금까지도 그 말씀을 명심하고 있는 기성세대들이 많다. 신체발부는 몸과 피부, 머리카락을 일컬으니 온 몸을 지칭하는 것이다. 즉 몸과 머리털, 피부는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므로, 다치지 않고 상하게 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라는 내용이다. 이런 말씀의 영향 때문에 우리는 문신 또한 금기시해 왔다.
 
   여하튼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서 필자의 첫 미국 운전면허증에는 장기 기증을 허락하는 빨간색 하트 문양이 없었다. 부모와 가족의 허락 없이 필자의 마음대로 장기 기증을 결정한다는 것은 가족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국에서 10년을 넘게 살다 보니 타인을 배려하는 미국인들의 태도에 감탄하는 일이 종종 생기게 됐다. 처음 한인 입양아 캠프를 갔을 때 눈색깔이 다른 부모가 지극한 정성으로 입양아를 돌보고 있는 모습을 봤을 때, 장애인 자원봉사자들의 모임에서 상대방의 아픔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있는 모습을 봤을 때, 반대편 차선에서 사고차량을 보고 유턴까지 해서 괜찮은지를 물어보는 운전자를 보면서, 나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이들의 태도에 고개를 끄덕인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지난주 뉴욕에서 갑작스런 뇌사판정을 받은 50대 한인여성이 죽음과 싸우고 있던 3명에게 장기를 기증해 새 생명을 주고 세상을 떠났다. 안타까운 감동을 안겨준 이 여성은 주일 예배를 마친 후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며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하지만 이 병원에서는 치료할 만한 의료 장비가 마땅치 않았고, 한참 후에야 맨해튼에 있는 다른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끝내 뇌사 판정을 받고 회생하지 못했다. 애초 9명에게 장기기증을 할 계획이었지만 입원 중 약물 치료를 받은 영향으로 인해 최종적으로 3명만이 이식 혜택을 받았다. 가족들은 의료진이 생존 가망성이 희박하다며 장기기증 의사를 타진해왔을 때 처음에는 그저 황망하기만 했다고. 평소 지병도 없었고 정기적으로 건강검진도 받으며 건강하게 지내왔던 고인이었기에 그의 갑작스런 죽음조차 쉽게 받아들일 수 없은 상황에서 장기기증까지 생각할 겨를은 더더욱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족들은 평소에도 어려운 사람들의 일이라면 발벗고 나서 도와주려고 애써온 고인의 생전 삶을 생각할 때 자신으로 인해 새 생명을 구할 수 있다면, 고인도 뜻을 함께 할 것이라고 믿고 장기기증에 어렵사리 동의하게 되었다. 가족들은 비록 사랑하는 엄마와 아내였던 고인은 세상을 떠났지만 그녀의 흔적이 세상 어딘가에서 새로운 희망으로 남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다고 했다. 감동을 주는 가족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인체 조직의 경우, 기증자 한 명당 최대 100명을 살릴 수 있다. 이미 최수종, 하희라 부부와 같은 유명 연예인들도 인체조직 기증서에 사인했다는 뉴스를 오래전에 들어본 적이 있다. 화상 환자는 피부를, 다리 저는 환자는 뼈, 연골, 인대를, 간암 환자는 장기이식을 위한 혈관을, 시각장애인은 망막을, 심장 질환자는 심장판막을 이식받아 새 삶을 살 수 있다. 기증자가 사망한 후 15시간 이내에 피부, 뼈, 연골, 인대, 건, 혈관, 심장판막 등을 구득한다. 인체 조직은 길게는 5년까지 이식재로 사용할 수 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인체 조직 및 장기 등 인체 유래물은 가급적 자국 내에서 자급자족할 것을 권고한다. 각국 내 인체 조직 기증량이 많아야 하는 이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의 인체 조직 기증 상황은 열악하다. 참 좋은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선뜻 결정하기가 어렵기 때문이 아닐까.

   필자도 뼈 속까지 한국인인 탓에 장기 기증에 대한 생각이 깊지 못했다. 하지만 주변에서 장기를 기증받아 새 생명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을 보면서 차츰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보면 장기 기증은 생명의 끝이 아닌 새로운 생명의 시작임을 깨닫곤 한다. 결국 지금 필자의 운전면허증에는 하트 모양이 그려져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한국이 장기 이식율이 낮은 것은 유교의 영향 탓으로 돌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유교사상에서 오히려 ‘살신성인’을 가르친 것을 기억해낸다면 유교의 영향만 탓할 일은 아닐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은 종교와 이념을 떠나 인간의 원초적 본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세 명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고 떠난 그녀는 평소 자신보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에 발 벗고 나선 삶을 살아왔다. 그랬기 때문에 소중한 생명을 살리고 떠나게 된 것을 누구보다 기뻐했을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사랑하는 고인의 죽음 앞에서 슬퍼할 겨를도 없이 급하게 그런 결단을 내려야 했던 가족들의 결정은 쉽지 않았으리라. 일생에서 가장 위대한 생명을 선물하고 간 그녀의 선행과 가족의 용기있는 결단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예전에 김수환 추기경께서 말한 행복한 삶처럼 필자도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당신이 이세상에 태어났을 때 당신만 울고, 당신 주위의 모든 사람은 미소를 지었습니다.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날 때에는 당신 혼자 미소짓고, 주위의 모든 사람이 울도록 하는 인생을 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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