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해 전 한국에서는 고가의 명품에 빠져 사는 허영심 많은 여자를 일컫는 ‘된장녀’라는 말이 유행했다. 그런데 요즘에는’루비(RUBY)족’이라는 말이 유행한다고 한다. 워낙 그쪽으로는 무지몽매한지라 처음에는 그 말을 보석을 좋아하는 여자쯤으로 생각을 했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다. 루비는 네 개 영어 단어의 알파벳 첫 글자를 따서 만든 신조어였다. 신선함(Refresh), 비범함(Uncommon), 아름다움(Beautiful), 젊음(Young)의 단어 첫 글자를 따서 조합한 말인데, 평범하고 전통적인 아줌마 상을 거부하는 40~50대 여성을 일컫는다. 과거 중년 여성들은 집안의 가계를 꾸리느라 자신을 가꾸지 못해 억세고 뚱뚱한 이미지였던 반면, 최근에는 자기 자신을 아름답게 가꾸는 중년 여성들인 루비족이 늘어나고 있다. 가족을 위해 희생하며 헌신하던 예전의 어머니와는 다르게 자기 자신을 가꾸는 데 열성적이어서, 수십만 원에 이르는 미용 시술을 애용하고, 실제보다 어려 보이기 위해 젊은이들의 옷 매장에서 옷을 구매하는 등 자기 자신을 위한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불황에도 불구하고 루비족을 겨냥한 고가 홈쇼핑 제품들이 연일 매진 사례를 보이고 있는 걸 보면 이 아줌마들의 파워는 여기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물론 이 곳 덴버에서도 루비족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결혼해서 집안일에 얽매여 살다 보면, 자신의 옷을 사는 것보다는 자녀들 옷을 사거나, 남편의 것을 먼저 사게 된다. 메뉴를 고를 때도 내가 먹고 싶은 것보다는 아이들이 좋아하거나, 남편이 먹고 싶어하는 것을 선택하게 된다. 필자 또한 지난 15년을 그렇게 살았으니 아주 먼 옛날 이야기도 아니다. 그런데 얼마 전 거울 속에 비친 나를 보면서 이제 나도 늙는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리고 직장일과 집안일에만 매진해서 달려왔던 우리들에게도 자신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아낌없이 투자하는 루비족들은 바로 그런 생각을 적극적으로 실천한 사람들일 것이다.

   주간 포커스 신문사를 창간하고 지난 8년간 쉼없이 달려왔다. 신문이 나오지 않는 주에도 새로운 기사를 기획하거나 커뮤니티 행사를 쫓아다니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 동안 딱 한번 한국을 방문했고, 그 기간 동안에도 한국에서 신문기사를 점검하고 칼럼을 송고했으니 신문사 일에서 완전히 손을 놓고 쉬지 못했다. 퇴근 후에는 아이들 숙제를 봐주고, 빨래에, 청소에, 다음날 도시락 반찬을 준비하며 하루도 빠짐없이 바빴던 시간들이었다. 그렇게 다람쥐 쳇바퀴 굴리듯 하루하루를 보내다 한달 전 즈음 필자는 여기에서 탈출하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치밀어 올랐고, 무작정 혼자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남편한테 샌프란시스코를 다녀와야겠다고 통보했다.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이 필요했었다.  남편은 갑작스런 필자의 통보에 처음에는 어리둥절해 했지만, 결혼 전에도 혼자 아프리카까지 다녀온 필자임을 알기에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하지만 늘 복병은 있기 마련이었다. 바로 작은 아들이었다. 필자의 여행 계획을 들은 녀석은 엄마 없으면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고 학교도 안 갈 것이라면서 하루 종일 울먹이고 칭얼댔다. 워낙 집요한 녀석이어서 1분 간격으로 계속해서 필자의 여행에 태클을 걸어왔다. 혈혈단신으로 자유 여행을 꿈꿨던 필자는 결국 7살짜리 아들을 옆에 달고 샌프란시스코로 향할 수 밖에 없었다. 혹 떼려다 되려 붙인 꼴이 되었지만, 막상 아들과 단둘이 시간을 보내게 되니 그래도 제법 즐거운 여행이 되었다. 금문교도 구경하고, 배를 타고 알카트레즈 감옥에도 들렀다가, 나오는 길에 게도 푸짐하게 먹고, 클램 차우더 스프도 빠짐없이 챙겨먹었다. 다음날에는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가 바닷가를 산책하고, 차이나타운에 가서 정말 맛있는 중국 음식도 먹고 아들이 좋아하는 목검 장난감도 하나 샀다. 마지막 날 밤에는 묵고 있던 호텔 바에 내려가 필자는 칵테일을, 아들은 과일 주스를 마시며 고급스러운 분위기에도 잠깐 젖어봤다. 혼자만의 여행을 꿈꿔왔지만 아들과의 이번 샌프란시스코 여행을 통해 누구와 함께 하는 시간의 소중함도 깨닫게 되었다. 만약 이 좋은 경치와 분위기를 나 홀로 누렸더라면 아마 두고 온 가족들 생각이 무척 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마도 세월이 흐르면서 자신을 위한 시간적 개념이 바뀌게 되어 그런지도 모르겠다. 처녀 때 세상과 시간은 오직 나만을 위해 돌아갔다. 혼자 몸이기 때문에 무엇이든 거침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나 이전에 가족을 먼저 생각하게 된다. 그렇다 보니 일상에서 나 혼자 탈출하는 것이 진정한 휴식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겉만 예뻐지기 위해 자신에게 투자한다는 여성들이 루비족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루비족을 반대하지는 않는다. 아름다움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여성들보다는 훨씬 낫다. 그러나 루비족이 자기 자신을 가꾸는데에만 열정적인 여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보니 단지 ‘허상을 좇는 속물스러운 여자’라고 규정해 버리는 이들이 많다. 자칫 외모만 꾸미는데 관심을 갖는 이기적인 여성의 이미지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루비족을 이렇게 정정해보는 것은 어떨까? R은 Respect(존중), U는 Upgrade(자기발전), B는 Beautiful(아름다움), Y는 Yield(양보)로 말이다. 가족들로부터 존중받고 존중하는 아내이자 어머니, 품격의 격상과 영성의 향상을 위해서 몰두하고 자각하는 중년여성은 얼마나 향기로운 여성인가. 외면의 화려함에 매달리는 우둔한 여자가 되기 보다는 내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명민한 여자가 더 아름답다. 명민한 루비족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만이 아니라 가족 모두의 아름다움에도 집중할 수 있는 여성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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