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아이가 걸음마를 시작하면서부터 여름이면 아이들을 데리고 워터파크에 놀러를 갔다. 3년 전 워터파크에 놀러갔을 때였다. 그 곳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곳인 인공 파도 풀에 들어가 튜브에 몸을 매달고 파도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붕하는 뱃고동 소리와 함께 파도가 밀려왔다. 으레 사람들은 파도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즐거운 함성을 질렀다. 큰 파도가 지나가고 정신을 차려보니 남편과 함께 튜브에 붙어 있어야 하는 둘째 아이가 사라져버렸다. 깊은 물 속에 빠진 것임을 확신하고 주변을 중심으로 아이를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곧 두번째 뱃고동 소리가 들려올 것이고, 그러면 다음 파도가 밀려와 잃어버린 아이를 찾기는 더욱 힘들어질 것 같아 눈앞이 캄캄해져왔다. 아이가 물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정신이 혼미해져 주변에서 떠드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풀장 한가운데 있는 우리 목소리가 구조 요원에게 들릴 리 없었다. 그래서 나와 남편은 필사적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베이비”를 외치며 도움을 구했고, 주변 사람들도 “베이비”를 함께 외쳤다. 이들의  목소리가 전해 전해져 구조 요원에게 간신히 도달했다. 결국 경고를 알리는 호루라기가 불려졌고, 막 밀려오려던 인공 파도도 중단되었다. 풀내에 있던 사람들이 한마음이 되어 물 속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서 둘째 아이를 함께 찾기 시작했다. 수영장 안은 우리 때문에 정지상태가 되었다. 필자는 목이 터져라 아이의 이름을 외치면서도 내심 ‘이 넓은 수영장에서, 한국어도 못 알아듣는 사람들과 함께 아이를 찾을 수 있을까’라는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다. 이내 아이를 찾지 못할 것 같은 공포가 눈물이 되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10여분쯤이 지난 것 같다. 수영장내 미국 사람들이 “물가에 조그만 아이가 울고 있다”는 말을 실신직전에 있던 필자에게 전달해 주었다. 높은 파도에 휩쓸려 들어간 게 아니고, 파도에 맞아 물가로 튕겨 나갔던 것이었다. 자그마한 체구 때문에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멀리 더 높게 튕겨 나간 탓에 주변에서 찾지 못했던 것이다. 그 시끄럽고, 사람 많은 야외 수영장에서 우리의 힘만으로 아이의 생사를 확인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어느 지점에서부터 아이를 찾아야할 지 몰라 울며불며 발만 동동 굴리고 있을 때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우리 가족은 어떻게 되었을 지 생각만해도 아찔하다. 끔찍한 경험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재작년에도, 지난해에도 아예 워터파크 근처에는 가지 않았다.

    2주전에 이러한 불가항력적인 일이 또 일어났다. 신문사는 4월 마지막 주에 정기 휴간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런데 4월 첫째주 신문 발행을 위해 만들어 놓은 모든 파일에 바이러스가 침투해 급기야 신문사의 메인 컴퓨터까지 망가져 버린 것이다. 손 쓸 틈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컴퓨터의 데이터와 모든 프로그램들이 한순간에 사라져버렸다. 순간 필자는 넓고 번잡한 수영장에서 잃어버린 아이를 찾고 있었을 때의 막막함, 딱 그 느낌이 들었다. 혼자서는 절대 해결할 수 없는. 또 한번의 무력감이 밀려 왔다. 맨처음 포커스를 창간할 때가 생각났다. 다운로드 받아놓았던 신문 편집 프로그램이 사라져서 창간 일주일을 남겨두고 지인의 도움으로 새 프로그램을 구해 창간호를 만들었다. 설상가상으로 신문 편집 경력이 있던 직원은 새로운 프로그램을 한번도 사용한 적이 없다며 자신없는 모습까지 보여, 창간의 길은 멀고도 험했었다. 그렇게 일주일 정도 밤낮으로 일해 포커스 창간호가 나왔다. 겉보기에는 별반차이 없어 보이지만, 창간호와 똑같은 절차로 제작된 것이 지난 주 신문이었다. 사라진 데이터 복구도 문제지만 컴퓨터 자체가 망가져서 현재까지도 원상복구를 마치지 못한 상태이다. 사실 필자는 컴퓨터가 복구될 때까지 신문 제작을 포기할 생각이었다.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이 아닌가. 아무런 데이터도 없이 처음부터 다시 신문을 만들어야 한다니 말이다. 하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신문 발행을 거른다면 이 또한 신문의 역할이 아니라는 주변의 질책과 용기로 인해, 포기하려던 우리는 지난 일주일동안 초심으로 돌아갔다.

    20여 년 전만해도 해야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이면 “삼일 밤새면 되지 뭐” 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당차게 위기를 넘겼다. 그런데 요즘엔 그 좋았던 일이 무서워졌다. 이틀 밤새는 것도 자신이 없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투털거리며 “나 힘들다”라는 앓는 소리부터 먼저 낼 때가 많아졌다. 나이에 맞지 않는 어리광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창간 당시 겪었던 힘든 시간을 지금 또다시 되풀이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솔직히 포기하고 싶었다.  이처럼 힘든 상황이 닥칠 때마다 항상 극단적으로 피하려는 필자를 옆에서 지켜본 남편이 이번에는 참다 못해 조언을 했다.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면 자기 자신이 더 편안해질 것이라며 진심어린 충고를 전했다. ‘살다보면 그럴 수 있지, 바쁘다보면 연락 못 할 수 있지, 인간이다 보면 실수할 수 있지, 애들이 그럴 수 있지, 외롭게 산 사람들이다보니 배려심이 없을 수 있지, 잘 모르면 그런 판단을 내릴 수 있지.’생각해보니 ‘그럴 수 있다’는 말 속에 참 많은 의미가 담겨져 있었다.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의미가 아닌가. 내가 잘못한 일을 빨리 반성하고 빨리 고치겠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 그렇게 나의 상황을 대입해 봤다. 즉 애들이랑 수영장에서 놀다보면 그런 일이 생길 수 있지, 살다보면 컴퓨터 데이터를 날려먹을 수도 있지 라고 생각하니 앓는 소리가 곧 헛웃음으로 바뀌었다. 우리는 좋았던 일은 추억이고, 나빴던 일은 경험이라는 말을 종종 한다. 그런데 그 나빴던 경험에도 ‘그럴 수 있지’라는 생각을 접목시킨다면 이또한 추억이 되지 않을까. 어려움이 닥쳐도 앓는 소리 없이 지나갈 것 같다. 오늘부터 나에게도, 남에게도 ‘그럴 수 있다’라는 자세를 가져보자. 현실이 자신의 바람과 다르다고 화를 내면 자신만 손해다. 올해는 아이들과 함께 워터파크에 다시 가 볼 생각이다. 그럴 수 있다.






저작권자 © 주간포커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