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에덴동산과 함께 그것을 아담, 즉 우리 사람에게 주셨습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은 천지를 우리 사람을 위해 창조하셨습니다. 세상은 아름다웠고 보기에 참 좋았습니다. 그리고 풍성했습니다. 하나님의 기쁨은 사람이 그것을 누리고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인데 우리 사람이 누리고 살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과 우리가 특별한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특별한 관계란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받은(하나님의 DNA가 있는) 자녀가 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가 창조하신 세상에서 사람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마치 자기 것처럼 누리며 살게 된 것입니다.

    한 나라의 왕이 현자를 불러와 물었습니다.‘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자가 누구겠느뇨?’ 현자는 대답하기를, ‘하나님입니다’ 자기라고 생각했던 왕은 조금 서운했지만 ‘이번에야 말로 나 일 것이다’하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그 다음에 행복한자는 누구라고 생각하느뇨?’ 현자는 대답합니다.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과의 그 특별한 관계가 모든 축복의 통로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아담과 하와는 사탄의 유혹 앞에 선악과를 따먹고 ‘그것만은 따 먹지 마라, 정녕 죽으리라!’는 御命(왕이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죄를 짖게 됩니다. 죄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다, 빗나갔다’라는 뜻이지요.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아담과 하와는 더 이상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릴 수 있는 자녀로서의 권세를 다 잃어버리고 에덴동산에서도 쫓겨났습니다. 갑자기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영원히 행복하고 풍성하고 아름다웠던 세상은 죄와 사망이 지배하는 한없이 추루하고 불행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사탄의 계획대로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버리시지 않았습니다. 죄로 인해서 죽게 된 인간을 향하여 ‘다 너 때문이다. 네 탓이야, 나 몰라’ 그렇게 말하지 않으시고, 집을 나가 허랑방탕한 탕자를 문밖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아버지의 심정으로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아니 본래부터 그게 하나님의 마음이였습니다. 죄로 타락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일은 사람이 끊어버린 관계를 다시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과의 관계단절을 죽음이라고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믿음과 구원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관계 회복을 위하여, 끊어졌던 줄을 다시 잇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꼭 필요했습니다. 하나는 용서고 하나는 회개입니다. 용서는 하나님이 하시고 회개는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용서와 회개를 위해서 또 꼭 필요한 것이 있으니 그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역사속에 결국 극단적인 사랑을 선택하십니다. 사람이 어떤 죄를 지었든지 그것을 다 용서하실 수 있는 사랑, 그래서 선택하신 것이 십자가입니다. ‘내가 너희를 이처럼 사랑한다’(요3:16)하시며 이 땅에 오신 독생자 예수님이기에 심지어 십자가에 못박히는 그 모진 고통속에서도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지금 저들이 하는 일을 몰라서 그렇습니다’(눅23:34)라며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까지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속죄양으로 온 몸의 피를 다 쏟으시고는 ‘다 이루었다’(요19:30)하시며 인간의 죄를 깨끗이 속량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심으로 인간의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인간의 모든 죄 값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믿음없는 눈으로 세상을 보면 다 죽음과 절망이 지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죽음은 생명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모든 절망은 희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절망과 어두움은 과정이고, 희망과 구원은 결론입니다. 죽음까지도 영원한 생명을 위한 시작으로 봅니다. 시인 <구상>님의 “말씀의 실상”이라고 하는 詩가 있습니다. “영혼의 눈에 끼었던 無明의 백태가 벗어지며 만유일체가 말씀임을 깨닫습니다/ 노상 보아왔던 손가락 열개가 작동하는 것도 이적에나 접한듯 새삼 놀랍고/ 창밖 울타리 한구석 새로 피는 개나리꽃도 부활의 시범을 보는듯 사뭇 황홀합니다/ 창창한 우주 허망한 바다에 모래알보다 작은 내가/ 말씀의 신령한 은혜로 이렇게 오물거리고 있음은 상상도 아니요, 상징도 아닌 실상으로 깨닫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없어서 절망하는게 아니라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절망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계시는 지천에 널려있습니다. 구석구석 어디를 봐도 하나님의 말씀이 보이고 하나님의 능력이 보입니다. 나무 한그루만 봐도, 새 한 마리만 봐도, 나비의 날개 짓을 봐도 하나님이 보이고, 새로 태어난 아기를 보면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한 분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 품질을 보면 그 제작자를 알 수 있는 것처럼... 저는 요즘 참 힘든 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있기에 죽을만큼 힘들지는 않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 외쳤던 하박국선지자의 고백을 붙들고 믿음으로 기다리며 버티고 있습니다. 세월이 약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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