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필자는 아버지에 대해 두어번 언급한 적이 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항상 고집불통의 전근대적인 사고를 고수하면서 어머니에게는 까칠한 남편으로, 자식들에게는 무섭고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그려진 듯하다. 그러나 이번주 아버지의 날을 맞아 또다른 당신의 모습이 문득 떠오른다. 
최근에 ‘아빠를 부탁해’ 라는 한국 방송 프로그램을 몇 번 본 적이 있다. 유명 연예인들과 그의 딸들이 나와서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을 담았다. 출연자들 모두 부녀사이가 어찌나 서먹서먹한지 시청자도 어색해서 자리를 피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을 보고 있자면 대중에게는 너무 유명한 아버지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아버지의 모습을 아는 딸은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딸들은 지금의 자신들과 비슷하게  고민하고 방황했던 시간이 아빠에게도 있었음을 알게되면서 서로에게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필자는 대학 다닐 때만 해도 아빠가 엄마만큼은 편하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아빠가 필자에게 불만이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신은 여자가 서울로 대학을 간 것을 탐탁하게 생각지 않으셨고, 배낭 메고 세계를 돌아다니는 딸은 더욱 그랬다. 또, 고등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제사모실 때 지방 쓰는 방법을 익히지 못한 것도, 9시 넘어서 집에 귀가하는 것도 불만이셨다. 그래서 참 오랫동안 아빠와 형식적인 대화만 나눈 것 같다. 그러다 결혼을 앞둔 필자에게 당신의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은 적이 있다. 그뒤 필자는 아버지의 자서전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필자의 마음은 존경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아버지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다. 군대를 제대하고 9급 군무원이 아닌 임시직으로 국방부 문턱을 밟았다. 그러고 난 몇 년 뒤 아버지는 9급 군무원이 되었고, 2급 이사관까지 가는데 38년의 세월이 걸렸다. 남들처럼 버젓한 대학이나 혹은 국방부 근무에 유리한 육군사관학교나 삼사관학교라도 졸업을 했었다면 그의 승진은 훨씬 빨랐을 것이다. 한국에서 성공을 위해 꼭 있어야 했던 학연, 지연이 없었던 아버지는 남들보다 더 많이 노력했어야 했다. 결국 38년이라는 세월을 국가에 바쳤고 대통령 훈장을 넘어 자랑스런 대한민국 훈장을 받고 퇴직하셨다.

    그의 38년, 아니 국방의 의무를 진 군대생활까지 계산한다면 40년이 훌쩍 넘는 세월동안 아버지는 학연, 지연없이 가족들을 위해 사투를 벌여야 했다. 참으로 외로운 싸움이 아니었을까 감히 짐작해 본다. 아버지는 매번 승진시험이 있을 때마다 자식 4명이 복작거리는 집에서 조그만 갈색 밥상을 펼쳐놓고 공부를 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매번 시험이 있을 때마다 밤샘 공부를 했었다. 물론 한번 떨어진 적도 있지만 그의 집념은 강했다.
정확한 시기는 생각나지 않지만 아버지가 군부대 차량정비창의 실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때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엄마가 집에서 쫓겨날 뻔 했다. 어떤 아저씨가 저녁무렵 케이크 박스를 집에 두고 간 일이 있었다. 엄마는 그냥 빵인 줄 알고 무턱대고 받아 둔게 화근이 되었다. 퇴근하고 오신 아빠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 당장 돌려주고 오지 않으면 집에 들어올 생각하지 말라며 엄포를 놓으셨다. 엄마는 옆에 있던 필자를 데리고 그 박스의 주인을 찾아 나섰다. 택시를 잡아타고 케이크 박스에 붙은 명함에 적힌 주소지로 찾아갔다. 기억이 가물가물하긴 하지만, 기름때가 가득 묻은 공업사들이 즐비한 골목이었던 것 같다.  간신히 찾아가 엄마와 나는 임무를 완수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물론 그 박스 안에는 케이크가 없었다. 당시 한국사회는 한창 군비리를 밝히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작은 잘못이라도 발견되면 문제가 커졌다. 그래서 그 당시 아빠와 함께 일해왔던 동료들도 여럿 옷을 벗었다. 그러나 아빠는 이 철통같은 감시를 당당하게 벗어났고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원칙주의 호랑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이사관의 자리에 올랐다. 아마도 아버지는 대한민국 국방부 역사상 연속근무기간은 제일 길고, 비슷한 서열에 비해 학벌은 제일 짧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필자는 살면서 아버지의 새로운 모습을 더욱 많이 발견하게 됐다. 이는 필자의 시각이 달려졌을 뿐, 아버지가 바뀐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군인 자녀 기숙사에서 대학 생활을 잠깐 했다. 아버지는 일요일 아침마다 기숙사로 전화를 걸어와 사감 장교와 얘기를 나눈 뒤, 내 방으로 교환을 요청했다. 막상 통화가 되더라도 하는 말은 똑같았다. 늘 “밥 챙겨 먹어라” 라며 간결하면서도 딱딱한 말투였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의 말투에서 정말 딸이 밥을 잘 챙겨 먹었으면 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전해졌다. 서울로 학교를 간 것이 늘 불만이었던 아버지였지만 딸이 필요한 것에 대한 지원도 아끼지 않으셨다. 대학에서 모든 과제물을 워드로 작성하거나 이메일로 제출하라고 해서 컴퓨터가 절실히 필요했다. 당시는 컴퓨터가 활성화되지 않은 때라 여간 비싼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고민 끝에 본인이 애지중지하던 롤렉스 시계를 팔았다. 그리고 20년이 지났고, 필자는 똑같은 시계를 사주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싫다고 하셨다. 대신에 필자는 3년전에 아빠에게 자가용을 한대 선물했다. 아버지는 한국의 좁은 주차공간 때문에 행여 딸이 사준 차에 흠집이라도 날까 밤마다 자기 전에 나가서 한번은 둘러보고 오신다고 한다. 

       아버지의 무뚝뚝한 말투, 무표정한 얼굴 모두가 이제는 근심어린 사랑임을 안다. 비단 필자의 아버지만 이렇게 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제서야 불러만봐도 가슴 찡한 단어가 어머니뿐만이 아님도 알게 되었다. 이를 깨닫는데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아버지는 당연히 돈 벌어오는 사람으로 생각했었다. 무섭게 야단치면서 항상 강할 것 같았던 호랑이 아버지는 어느새 손주들의 한마디에 웃고 우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 시대의 아버지들이야말로 가족을 위해 돈 버는 기계로서 인생을 희생한 외로운 사람들이다. 이번 주 일요일 파더스 데이 하루만이라도 세상의 모든 아버지가 행복하길 바란다. 비록 나이 들어 외모는 이빨빠진 호랑이가 되어가지만, 우리들에겐 영원히 멋지고 자랑스런 호랑이임을 다시 한번 전하고 싶다. 세상의 모든 가족들이여, 아빠를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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