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고 넓은 바다에서 상쾌한 바람을 맞고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작은 파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자기 앞에 있는 파도들이 해변의 바위에 부딪치면서 산산히 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 맙소사, 저렇게 끔찍할 데가 있나. 내가 무슨 일을 당할지 저것 좀 봐!’ 작은 파도가 절규했습니다. 그때 다른 파도가 뒤에 와서는 이 작은 파도의 기분을 알아차리고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슬픈 표정을 짓고 있니?’ 작은 파도가 다급하게 대답합니다. ‘넌 모를거야! 우린 모두 깨어진다구! 우리는 다 깨어져 없어져버린단 말이야! 정말 끔찍한 일이지 않니?’ 그러자 다른 파도가 말했습니다. ‘아냐, 넌 잘 모르는구나. 우리는 그냥 파도가 아니야, 우리는 바다의 일부라구....’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불의와 비참함을 보고 묻습니다. ‘전능하고 선한 하나님이 왜 이런 걸 내버려두지? 하나님이 있다면 왜 세상에 이런 일이 일어나느냔 말이야?’ 성경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선한 농부가 밭에 알곡을 뿌렸습니다. 그런데 나쁜 사람이 와서 알곡 사이에 잡초 씨를 뿌렸습니다. 잡초는 알곡사이에서 아주 무성하게 자랐습니다. 이것을 본 일꾼이 분개해서 농부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좋은 씨를 뿌렸잖아요. 그런데 이 잡초들은 다 어디서 온거죠? 이대로 두면 안돼요’ 농부가 대답합니다. ‘그건 나쁜 사람이 그런거예요’ 일꾼이 다시 말합니다. ‘그럼, 가서 다 베 버릴까요?’ 그러자 농부가 말했습니다. ‘안 돼요. 잡초를 베다가 알곡까지 벨지도 몰라요. 그냥 추수 때까지 내버려둬요. 그런 다음 잡초를 모아서 태우고, 알곡은 내 창고에 들이자구요.’(마13:24-30)
농부는 잡초를 베지 않습니다. 그는 신중합니다. 알곡에 결코 무관심하지도 않습니다. 이 성경 이야기는 세상에 악이 있는 원인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신중함을 이해하라고 당부합니다. 우리 안의 잡초와 알곡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은 오염되어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도 알곡과 쭉정이가 모두 자랍니다. 그것을 <상반됨의 긴장>이라고 말하지요. 그 긴장 속에서 사도바울은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탄식합니다. 그리고는 곧 이렇게 외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7:24-25)
우리는 알곡을 내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우리 마음에 알곡을 내는 일은 궁핍한 자를 보듬고. 약한 자를 일으켜 세우고,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고 불꽃이 다시 살아나도록 복돋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일방적이지 않기에, 하나님이 우리와 가까이하고자 하는 만큼 우리 역시 하나님 안에 깊숙이 머물고자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창조한 대상을 억지로 복종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고정된 것도, 우리와 무관하게 유지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우리 곁에, 우리의 발걸음에, 우리의 눈물 속에, 우리의 호흡가운데 있습니다. 우리가 받아들이고 의식하는 것과 하나님의 임재는 떼려야 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순간도 ‘영원히 항상 나와 함께 하는’(마28:20)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것도 마음대로 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것이 사랑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하려고 합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상대를 복종하게 할 수 있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그러지 못합니다. 사랑은 복종을 구하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협력을 구합니다. 그것이 사랑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은 천사들을 거느리고 낫을 휘둘러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을 막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했다면 잡초는 베어졌을 것이고, 악은 뿌리 뽑혔을 것이며, 인간은 하나님께 복종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했다면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는 권위를 잃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하지 않는 자들에게 억지로 선한 것을 불어넣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을 꼭두각시로 만드는 조치입니다. 인간 스스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갈 가능성과 품위를 앗아가는 것이지요.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떠났기에 자유의지로 돌아와야만 합니다. 그것이 믿음이고, 하나님은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고 돌아와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벧후3:9)
우리는 줄에 매달린 꼭두각시 인형이 아닙니다. 다만 ‘사랑의 줄에 매여’(호11:4) 있을 뿐입니다. 사랑의 줄은 우리에게서 권리와 의지를 빼앗아가는 전능함이 아니라 상호작용입니다. 마음속에 하나님의 영(성령)이 있으면, 그 사람은 존재의 순간마다 거룩하고 영원한 하나님의 임재와 협력하고 싶어집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우리 안으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머물 때, 우리는 자신과 남을 소중히 여깁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셔!’하면서 말이지요. 신앙은 바로 이것을 배워 나가는 과정입니다. 그것이 작은 파도의 배움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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