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세상에 강림하시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요1:14)는 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많다. 그러나 하나님의 강생(降生)을 바라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신인합일(神人合一)은 인류역사 이래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랜 염원이여, 오랜 이상(理想)이다. 샤머니즘, 이슬람, 브라마니즘- 이들 모두 신인합일(神人合一)을 믿는다. 누구나 엄한 아버지와 자애로운 어머니를 필요로 하듯이 영혼의 구세주를 누구나 필요로 한다. 그래서 한 인간에게 천자(天子), 교조(敎祖)의 칭호를 붙여 부르기도 한다. 모든 종교의 창시자는 한결같이 하늘의 뜻을 받들었다고 한다. 하나님의 강림을 믿는다는 사실에 있어 그들이나 우리가 동일하다. 다만 우리의 하나님과 그들의 신(神)은 성질이 다르다. 그들은 노력으로 올라가서 신(神)을 만나고 우리는 하나님 편에서 우리에게 내려 오셔서 만나 주신다.

어떤 모양으로 오셨나

애굽, 로마, 희랍, 중국 모두 황제숭배를 통해 신(神)의 강림을 받들고 섬겼다. 티베트, 일본 모두가 종교적 인물을 신(神)의 강림으로 받들고 섬겼다. 그들은 기적적인 인물, 눈부신 인물, 찬란한 모습으로 기대하고 또 섬겨왔다.  그들이 종교심이 없었던 것도, 충성심이 부족했던 것도 아니다. 다만 그들은 메시아가 가난한 사람, 배고픈 사람, 병든 자, 갇친 자의 모습으로 올 줄을 몰랐던 것이다. 동방박사들도 새 임금을 찾아 헤롯궁으로 먼저 갔던 것(마2:1-12)은 이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예수는 황제나 위대한 승려나, 학자의 모습이 아니라 겸손하고, 온유한 모습으로 오셨다(마11:29). 인류의 새 임금은 여인의 자궁을 통해 갖난 아기의 모습으로, 배고픔과 가난을 아는 사람의 모습으로, 동물이 기거하는 마구간의 인간과 동물의 경계선상에서 태어나셨다. 그러므로 이날은 인류의 자유가 탄생한 날이요, 구원의 오랜 꿈이 성취된 날이다. 이날은 역사의 신기원이요, BC(서력 기원전)와 AD(서력 기원후)의 분수령이며, 낡은 세대는 이날로 끝이 나고, 새로운 시대가 전개된 날인 것이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

아기를 찾아 뵙고 경배한 사람들은 정직하고 소박한 목자들이었다. 그들은 들판에서 철야 작업하는 노동자이며, ‘땅의 사람들’이었다. 지혜있는 자들은 자기들의 지혜로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한다(고전1:21). 하나님은 그의 깊은 뜻을 어린아이와 같이 소박한 삶들에게 나타내신다. 동방박사들은 별을 관찰하되 과학적인 견지에서가 아니라 인류의 운명과 관련지어 관찰하고, 정치를 충고하되 단지 정치학적 견지에서가 아니라 도덕적 견지에서 하며, 역사를 보되 ‘과학으로서의 역사’가 아니라 ‘의미로서의 역사’를 보는 사람들인 것이다. 지금도 인류의 운명을 걱정하는 자, 도덕과 윤리를 염려하는 자, 의미로서의 역사를 관찰하는 자는 아기 예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성경의 시므온이란 선지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구원하시는 섭리를 보기 전까지는 차마 눈 감고 죽을 수 없다고 버티었던 노인이다. 그러나 아기 예수를 보고서야 비로소 안심하고 죽을 수 있게 되었다. 또 한나 라는 여인 역시 일생 과부로 지내면서 아무런 낙이 없어 성전에서 기도만 하던 84세의 노파였지만, 이스라엘의 구원의 표시를 보고 이제는 평안히 눈감고 죽을 수 있게 되었다. 이 두 늙은이는 이제 남녀의 정념이 다 끊어지고, 인간적인 욕심이 세파에 다 씻겨 나간 후 머리에는 흰 눈을 이었고, 육안은 어두어졌지만, 영안으로 구세주를 발견한 이들이 된 것이다.  오늘도 현명한 자에게는 그 뜻을 가리우시고, 어리석고 소박한 자들에게 영안을 열어 주신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이제부터라도 조금은 어리석게, 조금은 소박하게 살아가도록 하자.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는 희열을 누리는 삶을 살아가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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