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에서 종종 동물의 왕국 프로그램을 방영할 때가 있다. 가끔 지상에서 가장 빨리 달리는 동물인 치타가 사냥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슴 떼가 풀을 뜯고 있는 것을 치타가 발견을 한다. 치타는 그 사슴 중에 사냥할 목표로 한 마리만을 미리 정한다. 수풀에 숨어 있던 치타가 갑자기 달려들면 사슴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도망을 친다. 사슴 중에는 미처 도망을 가지 못하는 놈들도 있다. 오히려 그런 사슴을 잡으면 쉬울 듯이 보인다. 그러나 치타가 다른 것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자기가 처음부터 목표로 한 그 사슴만을 따라가서 잡는다. 인간의 성공과 실패에 대한 깊은 연구로 권위를 인정받은 ‘나폴레옹 힐’이라는 학자가 있다. 그 오랜 연구 결과를 ‘성공의 법칙’이라는 책에 밝혀 놓았다. 그는 전 세계의 위대한 지도자들과 성공한 사람들 500명을 대상으로 연구를 했다. 그 결과 성공한 사람들에게는 한결같은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들은 먼저 자기가 꼭 이루기를 원하는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목표를 향해 무서운 열정으로 달려갔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그들은 어떤 어려움과 난관에도 그 목표를 포기하지 않았다. 마치 치타가 사냥을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사실 이 모든 법칙들은 성경에서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믿음의 성취를 단지 세상의 성취로 바꾸었을 뿐이다. 2016년도 새해가 밝았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1년을 선물로 주셨다. 지난 해를 잘 보낸 사람들에게만 새해를 선물로 주신 것이 아니다. 비록 번번히 실패하고 좌절을 겪었던 지난 해일지라도 새해 365일의 선물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 것이다. 문제는 이 하나님의 선물을 우리가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한 해를 준비하는 분명한 목표가 있어야 한다. 누구나 다 가질 수 있는 막연한 꿈이어서는 안 된다. 새로운 날을 선물로 주신 그 분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는 꿈이어야 한다.  어떤 분이 한국의 카이스트 대학원생 500명 앞에서 강연을 하게 되었다. 카이스트는 한국의 미래를 이끌어 갈 최고의 과학도들이 공부를 하는 학교이다. 강연 중 앞에 있는 학생들에게 질문을 했다. “학생은 꿈이 뭐예요?” “과학자가 되는 것입니다.” 아주 맑고 자신있게 대답을 했다. “과학자가 되어서 뭐 하시게요?” 이번에는 대답이 없었다. 그저 머리만 긁적거렸다. 옆에 있던 여학생에게 또 물었다. “학생은 꿈이 무엇입니까?” “교수가 되는 것입니다.” “교수가 되어서 뭐 하시게요?” 그 여학생은 이렇게 희미하게 대답을 한다. “그냥 교수가 되고 싶어서요” 옆에 있던 또 다른 남학생에게 질문을 한다. “꿈이 뭐예요?” “백만 장자가 되는 것입니다.” 씩씩한 그 친구의 대답에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백만 장자가 되어서 뭐 하시게요?” 드디어 이번에는 시원한 대답이 나왔다. “잘 먹고 잘 살려고요.”  이 학생들 모두에게는 꿈이 있다. 목표도 분명하다. 과학자가 되고 교수가 되고 백만 장자가 되는 것은 가슴에 품을 만한 꿈이다. 그러나 그 꿈 너머의 꿈이 없다. 과학자가 되는 것보다는 과학자가 되어서 무엇을 할 것인지가 더 중요하다. 바로 이 꿈 너머의 꿈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돈을 많이 버는 것은 우리 모두가 가진 꿈이다. 돈은 적은 것 보다는 많은 것이 좋다. 그러나 그 꿈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 번 돈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인생의 진정한 성취는 바로 여기에서 오는 법이다. 이 꿈 너머의 꿈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부름의 상은 다음 3단계를 통해서 얻을 수 있다. 첫 번째는 이 세상에서 주는 복을 거절하는 어려운 결심이 먼저 와야 한다. 모세는 왕족의 지위를 포기했다. 모든 인생의 영화를 거절한 것이다. 이것은 어려운 용단이었다. 가만히만 있어도 얼마든지 누릴 수 있는 복들을 던져버린 것이다. 인생의 더 큰 가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책상 서랍을 정리하다가 디지털 카메라에 들어가는 메모리 칩을 발견하게 되었다. 요즈음 카메라는 필름을 사용하지 않는다. 메모리 칩으로 사용했다가 지우고 또 다시 쓰고 있다. 그런데 서랍에서 발견한 칩은 8MB짜리였다. 요즈음에는 최소한으로 쓰는 칩이 2GB짜리이다. 용량 차이가 수백 배도 더 난다. 그래도 7-8년 전에 몇 십 불을 주고 산 것이다. 하지만 전혀 아깝지가 않았다. 그 칩에는 사진을 한두 장 밖에는 저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대로 쓰레기통에 버렸다. 가지고 있어야 쓰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짐만 될 뿐이다. 바울이 자기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버릴 수 있었던 것은 예수를 아는 지식이 너무 고상했기 때문이다. 모세가 공주의 아들로서의 지위를 버린 것도 하나님의 부름이라는 더 큰 가치를 가진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부름의 상을 위해 달려가기 위해서는 기꺼이 값을 지불해야 한다. 모세는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것을 택했다. 하나님의 부름에는 축복과 영광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일을 하는 데 칭찬과 격려만 있지 않다. 때로는 고난과 아픔이 찾아오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즐기는 대신 참으려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즐기는 자리는 언제나 사람이 넘쳐 나는 법이다. 즐기기도 하고 하늘의 상급도 받는 자리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그런 자리는 결코 찾기가 쉽지 않다. 끝까지 참아야만 하는 자리가 있다. 할 말도 잘 못한다. 화를 내기도 어렵다. 그 자리를 절대 포기하면 안 된다. 바로 그 참는 자리에 우리를 부르신 부름의 상이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일시적인 것보다는 영원한 것을 선택해야 한다.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받는 비난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다. 애굽의 보화는 눈에 보이는 재물이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서 받는 아픔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재물이다. 애굽의 보화는 지금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늘의 보화는 나중에 받는다. 상은 나중에 받을수록 큰다. 처음에는 신인상부터 주어진다. 그 다음에 조연상을 시상한다. 삼등상, 이등상, 점점 분위기가 고조가 된다. 드디어 일등상이 발표가 된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다. 마지막 대상이 남아 있다. 사회자들이 부를까 말까 주저하다가 드디어 대상을 부른다. 큰 상일수록 지금 받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받는다. 이 땅에서 받는 상은 그리 큰 상이 아니다. 우리를 부르신 부름의 상이 가장 큰 상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주는 복을 거절하고, 힘들어도 값을 치르고, 일시적인 것보다는 영원한 것을 택할 때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부름의 상을 주실 것이다. 올 한 해는 하늘에서 부르신 부름을 상을 향해 힘차게 달려가실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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