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말

       인간 청년예수는 그의 나이에 비해 생활의 책임이 너무나 무거웠으며 일이 많아 헛된 날이란 하루도 없었습니다. 그는 인류의 구원자로서 온전하실 뿐만 아니라 세금을 내는 시민으로서, 동생을 부양하는 소년가장으로서 마을의 모범 청년으로서 나무랄 데가 없었습니다. 그는 동생들이 지금은 나의 양육 책임 아래 있지만 그들 생명 하나하나가 온 천하보다 귀중한 것으로 믿었으며, 또 하나님이 장차 그들을 통하여 이룩하실 큰 역사에 기대를 걸면서 동생들을 돌보았습니다. 그는 가난을 손수 맛보았으며 사람은 먹어야 사는 동물이라는 가장 절실한 진리를 어려서부터 익혀왔습니다. 그가 가르친 기도문(마6:9)에는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했습니다. 10년, 20년 먹을 풍족한 양식이 아니라 그날그날 먹을 하루의 양식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그는 ‘질고를 알고’‘간고를 많이 겪은 사람’(사53:3)이었습니다.

2.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다.

        하나님은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어리석은 자를 들어 지혜로운 자를 부끄럽게 하십니다(고전1:26-31). 하나님은 상식의 청년을 들어 만민을 구원하시려고 그의 마음속에 큰 불덩이를 넣어주셨습니다. 그가 즐겨 읽던 예언서 미가(미2:1-3; 3:1-3)에서 끓어 오르는 정의감과 구원애를 느꼈을 것입니다. 옳은 의(義)글자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는데 윗부분은 양(羊)이라는 글자요, 아랫 부분은 나(我)라는 글자입니다. 즉 무방비하고 상처 받기 쉬운 순한 양 앞에 내가 섰을 때 내가 이 양들을 지키고 보호해야 되겠다고 하는 끓어오르는 정서가 ‘의로운 생각’이요, ‘정의감’이라는 말입니다. 그는“가서 저 사람들을 구원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대패질할 때 예수의 심장에 고동치던 피와 세례받기 위하여 요단 강가에 섰을 때의 피는 물리적으로는 같을지 모르나 그 의미는 전혀 달랐습니다. ‘직업’과 ‘천직’이 어디가 다릅니까?  직업은 밥먹기 위해 하는 일이요, 천직은 목숨을 바치기 위해 하는 일, 하늘이 시켜서 하는 일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소명을 받아야 합니다. 하늘의 소리,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하는 순간에, 어떤 이는 전문 분야 속에서, 어떤 이는 민중의 부르짖는 아우성 속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부르시는 음성을 듣습니다. 에스겔,다니엘,하박국 모두가 소명을 받을 때는 몸살을 앓았습니다. 일상의 매너리즘과 전혀 구별되는 ‘누미노제’의 경험을 전율하면서 맛보아야 합니다(사6:5; 눅5:8).사무엘은 소년시절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었고 예레미야는 24세쯤에, 이사야는 20세쯤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언더우드는 24살 신학생 때 한국의 선교사로 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스텐리 죤스는 24살 때 인도로 가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3. 메시아로서의 자각

       그러나 그 대오(大悟)는 성인 군자로서의 자각이 아닙니다. 인간사에 초연한 무행동의 성인 군자가 아니라 인간사에 개입하고 인간사를 끌어안는 대각성인 것입니다. 크리스천의 신앙이 잘못되면 하늘 나라를 이땅에 임하게 하는 노력은 회피하고 혼자만 천국에 들어가려고 하는 탈출지향적 신앙이 되기 쉽습니다. 예수의 종교는 적요한 명상종교가 아니라 삶의 종교요, 행동의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구원은 탈역사적 해탈이 아닙니다. 예수의 자각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각이었습니다.  이 고난에 찌든 백성, 절망한 이웃, 이 사람들을 누군가가 나와서 용기를 주고 희망을 주어야 할텐데 그 일을 할 사람이 바로 ‘나’라고하는 그런 자각, 그런 자아의식(self-consciousness=메시아 의식)이 그로 하여금 구세주로 일하게 한 것입니다. 이 소명의식은 그로 하여금 30년 동안 정들어온 대패와 망치를 내동댕이 치고, 집을 나서게 하였습니다. 그의 가족은 예수가 미쳤다고 잡아다 집에 앉히려고 찾아 다니곤 했습니다.

4. 나오는 말

       예수와 나폴레옹이 어디가 다르며, 예수와 히틀러가 어디가 다릅니까. “내가 바로 그 일을 해야 할 인물이다”라고 생각하는 ‘강한 자의식’, ‘메시아 콤플렉스’는 유사한 점이 있습니다만, 근본적 차이는 자기 철학의 관철을 위하여 민중을 죽이느냐, 아니면 민중을 살리기 위하여 자기가 희생제물이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전자는 헌신의 대상이 없으므로 자기 영화화, 자기 신격화의 종국이 있고, 후자는 헌신의 대상이 뚜렷하므로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생명을 바칩니다. 예수는 자신을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마20:28)로 여겼습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작은 그리스도’(A little Christ)입니다. 누군가가 완전한 희생을 감행할 때 역사는 1mm정도 전진합니다. 양초는 자신을 녹여 사방을 밝힙니다. 그러므로 작은 그리스도들이 가져야 할 자아의식은 철저한 피택의식과 부활의식입니다. 예수는 굴러가는 역사의 수레바퀴 밑에 자신의 몸뚱아리를 던졌습니다. 그는 결국 찢기고 죽었으나 역사의 수레바퀴는 궤도를 수정했고 인류는 이날부터 참생명의 세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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