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지금까지 목회를 하면서 잊혀지지 않는 실수가 하나 있다. 켈리포니아에서 목회를 할 때였다. 가족들과 오랜만에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미국으로 돌아오기 며칠 전 교회를 열심히 섬기시는 한 권사님의 어머님이 소천을 하셨다. 오래 전부터 나에게 장례 부탁을 하셨던 분이다. 하지만 내가 장례집전을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다른 목사님에게 부탁을 했다. 전화상으로도 그 권사님은 아주 아쉬워했다. 내가 미국으로 돌아온 다음 날이 삼우제인데 그때라도 예배를 인도해 달라고 부탁을 해왔다. 나와 아내는 미국에 도착한 다음 날 아침 차를 운전해서 정해진 약속장소로 갔다. 그날 따라 차가 어찌나 막히는지 마음이 아주 조급해졌다. 약속 시간이 20분이나 지났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당연히 기다리고 있어야 할 유족들이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이곳 저곳을 찾아보아도 아무도 없었다. 그제서야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했다. 갖고 있던 약도를 자세히 보았다. 그 순간 아차 싶었다. 장례예배를 드렸던 장의사로 갔던 것이다. 그 주보 자체가 며칠 전 장례를 치른 순서지였기 때문이다. 덴버는 거의 장례식장과 장지가 한 곳에 붙어있는 경우가 많다. 장례예배를 치르고 먼 거리로 이동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켈리포니아는 조금 다르다.

      특히 한인들이 운영하는 장의사는 자체적으로 장례식장을 갖추고 있다. 그곳에서 예배를 드린 후 경찰 사이드카의 에스코트를 받아가면서 최소한 30분 정도 이동을 해서 장지로 가는 것이 보통이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장례식장으로 간 것이다. 삼우제는 장지에서 해야 하는데 말이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나는 하늘이 노랗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약속시간은 이미 30분이나 지나 버린 상태였다. 마음이 급해졌다. 다시 장지를 향해서 차를 급하게 몰았다. 지름길을 찾는다고 하다가 전혀 다른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당시에는 차에 네비게이션도 없을 때였다. 약도를 보고 찾아야만 했다. 이리 저리 돌고 돌면서 내가 어디에 있는지 조차 잊어버리고 말았다. 참 난감했다. 아직 시차도 풀리지 않은 상태라 정신이 멍해졌다. 그 상태로는 길을 찾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결국은 한적한 곳에 차를 세웠다. 길게 심호흡을 했다. 운전대를 붙잡고 눈을 감았다. 길을 정확하게 찾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다. 그 후 눈을 떠보니 내가 어느 위치에 서 있는 지가 보였다. 그 후에 지도를 다시 꺼냈다. 장지까지 가야 할 길들을 정확하게 메모를 한 후에 차를 다시 출발시켰다. 결국 장지에 도착은 했지만 한 시간도 더 늦고 말았다. 수 십 명이 넘는 유가족들이 예배를 인도할 목사가 오기만을 불편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이에 가족들간에 언짢은 일도 일어났다. 얼마나 미안하고 죄송한지. 사람은 참 이상하다. 길을 잃으면 더 빨리 달린다. 마음이 더 급해지기 때문이다. 급한 마음으로 길을 찾으면 사고도 날 수 있다. 엉뚱한 길로 들어서서 오히려 더 늦어지는 경우가 많다. 길을 잃으면 달려서는 안 된다. 우선 멈추어야 한다. 마음을 가다듬고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렇다고 결코 늦는 것이 아니다. 예정보다는 조금 늦는 한이 있더라도 사고가 나지 않는다. 길을 잘못 들어 일을 그르치지도 않는다.

      한국에서는 아이를 잃어버릴 때가 종종 있다. 워낙 길거리에 사람이 많기 때문에 아이 손을 놓쳐 버리기도 한다. 놀이 공원에서도 아이를 찾는 방송이 심심치 않게 나온다. 재래시장에 엄마와 같이 나왔다가 재미나는 것에 이끌리다 보면 그런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잃어버린 아이를 찾는 원칙이 하나 있다. 가까운 곳부터 찾으면 안 된다. 어른들은 아이가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잃어버린 장소에서 가장 가까운 곳부터 찾기 시작한다. 하지만 길을 잃은 아이들은 절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두려움과 걱정이 생기면 걸음이 얼마나 빨라지는지 모른다. 어디인지도 모른 채 무조건 쉬지 않고 간다. 짧은 시간인데도 이미 먼 곳에 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이가 그 시간에 갈 수 있는 가장 먼 거리부터 시작해서 가까운 곳으로 찾아오는 것이 지혜로운 방법이다. 우리 집에 큰 아이가 3-4살 정도였을 때였다. 교회에서 여름성경학교를 했다. 어린아이들 300명이 교회를 가득 메웠다. 당시 아이들은 부모들이 없어도 그들 스스로 얼마든지 교회에 올 수 있는 환경이었다. 교사들이 나가서 동네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교회로 데려오는 일이 다반사였다. 교사들은 교사들대로 아이들을 가르치느냐 바빴다. 엄마들은 그 아이들 음식 만들어주느냐고 정신이 없었다. 그때 우리 아이가 교회 밖 마당에서 놀다가 그만 교회 밖으로 나간 것이다. 그리고는 사라지고 말았다. 교회 어디를 찾아보아도 없었다. 교회 근처에 갈만한 곳은 다 찾아보았다. 결국 아이를 찾은 곳은 교회에서 1마일 정도 떨어진 재래시장이었다. 아이는 울면서 무조건 걸어간 것이다. 그곳에서 아이를 찾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사실 빨리 간다고 길을 찾는 것이 아니다. 빨리 가면 갈수록 길을 더 잃어버리고 말 뿐이다.

        안젤름 그륀의 “하루를 살아도 행복하게”라는 시가 있다. “지금 이 순간, 숨 가쁘게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면 잠시 멈추어 서서 자문해보라. 나는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내가 가고자 하는 곳은 어디인가? 내가 진정으로 그리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이 가장 후회하는 것은 실패하는 것이 아니다. 할 수 있었는데도, 하고 싶었는데도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것을 가장 후회한다. 지금 우리는 어디를 향해서 가고 있는가? 내가 그토록 가고자 했던 곳은 어디인가? 내가 간절히 원했던 것은 무엇일까? 갑자기 모든 현실을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같은 일을 하더라도 목적의식이 달라지면 된다.  잊고 살아왔던 꿈을 다시 꾸면 된다. 그러면 잃었던 삶의 열정을 다시 회복할 수 있다.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달리다 갑자기 그 자리에 멈추는 습관이 있다. ‘내 영혼이 따라 오는지 돌아보기 위해’서 이다. 달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멈추는 것은 더 중요하다. 잠시 멈추어 선 지금의 시간이 더 없이 소중하고 값지기 때문이다. 그래야 내가 달려온 길을 다시 돌아볼 수 있다. 가던 길에서 잠시 멈출 줄 알아야 내가 가고자 하는 길도 잘 보이는 법이다. 내가 너무 바쁘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일하실 틈이 없다. 내가 멈추어 서야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가 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조용하게 귀를 기울이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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