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학자들이 인간을‘종교적 존재’로 보는 이유는 인간만이 무덤이 있고 동물에게는 무덤이 없다는 점이라고 했습니다. 즉 사람은 죽음을 생각하는 존재로 그의 죽음에는 엄숙한 그 무엇이 있습니다. 인간의 죽음에는 초자연적인 것, 신비적인 것이 있습니다.

1.사람의 죽음
사람의 죽음은 동물의 그것과 다릅니다. 사람은 죽음에 임하여 영적 존재(Spiritual Being)가 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죽음의 모습은 모두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으로 의사인 심슨씨는 300명의 신자의 죽음과 300명의 비신자의 죽음을 비교해 본 결과 신자의 얼굴에는 평화로움과 잔잔한 어떤 동경이 깃들여 있었다고 했습니다. 죽은 후의 얼굴(Death mask)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평소의 그의 신앙과 그의 인격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한자의 죽음이라 글자(死)는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으니 하나(一)와 저녁(夕)과 비수(匕)입니다. 즉 ‘죽음은 하룻밤에 비수와 같이 날아 들어오는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 ‘죽음의 예비생’입니다. 삶 속에 이미 죽음이 있고, 죽음 안에 삶이 있습니다.

2.예수님의 죽음
본문에 보면 예수님의 죽음을 구경하러 모였던 사람들이 가슴을 치며 돌아갔다고 서술되어 있습니다. 백부장(유대인도 아닌 로마의 장교)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으며, 또 예수님을 보고 “이 사람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었구나”(마27:54)라고 고백했습니다. 오죽하면 태양이 빛을 잃고, 지진까지 일어나겠습니까?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보도하는 기사와 죽음의 의미를 서술하는 기사가 있습니다. 오늘은 십자가 죽음의 의미, 즉 속량, 대속에 관한 교리적 해석 보다는 예수님이 죽음을 맞이한 태도에 대해서 주목하려고 합니다. 베드로전서의 본문은 그가 얼마나 점잖고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 했는가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기적의 능력이 있는 분이 그 기적의 힘을 자신이 다급할 때 사용하지 않은 점, 자신이 각박할 때 남을 구원하고 남을 위해 기도한 점은 우리가 두고두고 배울 태도입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가운데 주님의 대속의 은혜만 기뻐하지 그를 본뜨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삶은 죽음의 연습입니다. 믿는 자는 죽음 앞에서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는 수양을 평소에 쌓아야 합니다. 십자가형에 처해지는 죄수에게 주는 신포도주는 진통제와 마취제의 성격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신포도주가 두 번 제공되었는데 한 번은 거절하고 한 번은 드신 이유는 첫째‘흐려지지 아니한 맑은 정신’으로 인간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께 용서의 기도를 드려야 할 일이요, 둘째는 오른쪽 십자가에 달린 죄수를 구원하는 일이요, 셋째는 어머니의 여생을 사랑하는 제자에게 부탁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일을 처리한 후에는 목마르다 하시고 해융에 적셔 나무가지로 올려주는 신포도주를 드셨습니다. 운명 직전까지 행동 하나하나가 인류구원을 위한 사랑의 실천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또 다시 우리는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3.죽음은 하나님의 창조적 장치
자연주의자나 유물론자나 일부의 휴머니스트들은 죽음을 ‘허무에의 길’이라 봅니다. 죽음이란 육체가 흙으로 돌아가는 길이요, 무에서 태어나 무로 돌아가는 길이라 봅니다. 물리학적 입장에서 보면 죽음은 정녕 산소, 수소, 질소와 같은 원소로의 환원입니다. 그러나 이천년 동안 지상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와는 생각을 달리하고 있습니다. 죽음은 인생의 종말이 아니라 삶의 일부요, 하나의 ‘변화(Transformation)’, 하나의 ‘변질(Conversion)’이라고, 인간은 단순한 물질이거나, 생명의 유기적 현상에 그치지 않는다는 신념입니다. 그것은 입증해야 하는 검증의 대상이 아니요, 신앙과 신념의 대상입니다. 만일 자기 자신이 태어나기를 의도하거나 결정한 사람이 없다면 삶은 던져진 것, 명령된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Life’를 동양인은 생명(生命)이라 번역하는데 그 뜻은 생(生)은 명령(命令)이라는 말입니다. 생명이 던져진 것이라면, 죽음은 그 생명을 던져준 자에게로의 복귀(復歸)요, 삶을 명하신 분에게로의 귀환(歸還)입니다. 죽음을 허무에의 몰입이나, 원소에로의 산화(散華)로 볼 때와 죽음을 영원자(永遠者)에로의 소환(召還)이라 볼 때는 그들의 삶의 내용이 달라집니다. 삶은 무목적, 무방향의 과정이 아니라 종국과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삶을 하향적 흐름으로 보느냐, 상향적 승화로 보느냐에 따라 죽음의 위상이 달라집니다. 과정 철학에서 모든 실재는‘완성에의 경향’을 가지고 있고,‘되어가는 존재’(다 끝난 것이 아니라 becoming의 존재)라고 봅니다. 죽음은 단지 흐느끼며 사라지는 심리의 마지막 토막이 아니라 새 생명에의 통과제의(通過祭衣)입니다. 죽음은 인간을 엄습하는 폭군이 아니라 하나님께 바쳐질 예술 작품입니다. 일생일대의 마지막 연기(演技)입니다. 그리스도의 손을 잡고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황홀한 그 순간, 예수님처럼 “아버지여 내 영혼 아버지께 맡기나이다”라고 속삭일 수 있었으면! 하고 바라 마지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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