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깜깜한 밤입니다. 내 영혼의 밤은 세상의 밤이 감히 만들어내지 못하는 칠흑 같은 어두움입니다. 그 어둠의 엄청난 크기 앞에 나는 소름끼치는 두려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공간과 시간을 넘어선 어떤 운명과 같은 크기로 엄습해 옵니다. ‘촛불 하나로도 어둠은 물러간다’ 하지만 그 촛불 한 개가 밀어낼 수 있는 어둠은 참으로 빈약한 것입니다. 그 빈약한 불빛 앞에 앉아 있는 나는 얼마나 작은 존재일까요? 그래도 우리가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은 ‘밤이 깊으면 별이 더욱 빛난다’(夜深星逾輝)는 진리입니다. 세월이 힘든 사람들이 자주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까닭을 알 것도 같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별을 바라보라는 하나님의 뜻도 이해할 것 같습니다.  얼마 전 영화 ‘히말라야’를 본 후, <엄홍길>대장이 이끄는 <휴먼원정대>의 다큐를 보면서 히말라야의 엄중함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히말라야의 산기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티벳계나 셀파족으로 우리와 같은 몽골족입니다. 얼굴이나 말의 억양이 우리와 너무 닮았습니다. 그들이 여기 저기 내건 만장기가 히말라야의 칼바람 앞에 힘겹게 나부끼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그런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그 멀고 먼 세월에 밀리고 밀려서 거기 그 척박한 산기슭에 이르러 용케도 정처를 잡았군요. 그래도 마음 저버리지 않고 히말라야의 차가운 물에 정갈히 씻어 곱게도 간수했네요...’ 그들의 선량하기 그지없는 얼굴을 보노라면 타락한 인간 속에 녹아있는 투쟁본능마져 그 험한 히말라야에서 눈보라와 씨름하느라고 모두 소진시켜 버렸음에 틀림없습니다. <휴먼원쟁대>에서 <엄홍길>대장은 그렇게 말하더군요. ‘사람들은 히말라야의 고지에서 무슨 인생의 심오한 진리를 깨닫기라도 하는 줄 알지만, 히말라야의 8,000m를 넘어서 보십시오. 그 다음부터는 생존의지 밖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들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많은 것을 만들고 많은 것을 소유한 나라에서 살고 있지요. 그리고 이 히말라야마져도 정복하려고 달려듭니다. 그러나 히말라야는 우리에게 신(神)입니다. 우리는 산이 허락하는 만큼의 땅만을 일구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 가족이 먹고 살 수 있을 만큼만 일구지요. 농토의 넓이도 한 사람, 두 사람으로 셉니다. 그것으로 우리는 행복합니다’ 그들의 말은 마치 히말라야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같았습니다.  히말라야의 최고봉인 에베레스트는 (흔히 에베레스트인지, 에레베스트인지 헷갈리는) 영국 측량기사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것이라고 합니다. 네팔이나 티벳에서는 ‘높고 성스러운 곳이라’는 뜻으로 예부터 ‘큰 바다의 이마’(사갈고트) 또는 ‘세계의 여신’(초모랑마)이라고 부릅니다. 이 곳 사람들은 정상에 오르는 일이 없다고 합니다. 그 곳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경외(敬畏fear)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두려움대로 남겨두어야 사람이 사람된다고 합니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는 이 경외의 대상을 넘보고 하나님처럼 되려다가 사람의 진정성마져 잃어버리고 말았지요.  인생의 어둠속에서 듣는 그 곳 사람들의 이야기가 별빛처럼 가슴을 파고듭니다. 두려움을 남겨두지 않는 한 인간은 인간에게 인간적일 수 없고 자연에게 자연적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험과 도전이라는 인생의 서부행(西部行)에 나서기 전에 먼저 어둠과 별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합니다. 그들의 숨소리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어둠이 우리에게 허락하는 우주의 크기와  소리를 확인해야 합니다.

         나는 어려움을 겪을 때 더 하나님을 신뢰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볼 때 하나님과 씨름하고 싶습니다. 나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에 그저 감사하고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것은 유치할 만큼 작은 믿음일 것입니다. 부유한 여인이 자신의 어린 아들을 데리고 길을 가다가 길 한쪽켠에 박스로 세운 집에 기거하고 있는 홈리스패밀리를 보면서 ‘자 봐라 너는 저 거지들과 같지 않아서 얼마나 행복하니?’라고 말하는 모습은 얼마나 유치한 행복일까요? 그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요? 자기만의 행복 안에서 마비된 믿음은 무지와 자아도취라는 뿌리위에 자란 추루함 입니다. 어두움은 몸이나 마음의 고통을 동반합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 고통을 피하기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또한 살면서 좋은 울림을 내고자 하는 마음은 고통을 통해 유지되는 것입니다. 고통을 겪을 때, 우리는 우리 안에서 잘못된 것을 고치고자 하는 마음이 용솟음칩니다. 보석은 깍아져야 합니다. ‘어휴, 하나님 이거 싫어요!’ 이런 기도 한 번으로 인생의 어두움이 씻은 듯이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이 내 뜻을 모두 들어 준다면 나는 돌이킬 수 없는 위기에 처할지도 모릅니다. 내 몸에 통증을 모르는 감각마비가 곧 한센병(문둥병)입니다. 우리는 모두 어두움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신비한 방법으로 그 어둠가운데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이 함께 한다고 해서 어둠이 사라지지도 않고, 물음에 대한 답을 다 얻는 것도 아니지만, 심오한 위로가 우리 안으로 스며듭니다. 우리는 인생의 어두움을 다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단 어둠가운데 믿음으로 서 있을 뿐입니다. 오순절의 성령강림을 기다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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