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은 금녀의 스포츠였다. 미국내에서 마라톤 대회가 70회를 맞을 동안 여성들은 뛸 수 없었다. 그러다가 1967년 제71회 보스톤 마라톤 대회에서 이변이 발생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마라토너들이 참가를 한 이 대회에서, 대회 도중 한 기자에 의해 찍힌 사진이 미국 전역을 떠들썩 하게 만들면서 마라톤의 역사가 바뀌게 되었다. 이 사진은 한 여성 마라토너를 레이스 중 강제로 끌어내려했던 장면이 찍힌 사진이었다.

          당시만 해도 마라톤은 여성의 체력으로는 뛸 수 없다고 여겨 남자들만의 전유물이었다. 이런 현실을 타파하고 싶었던 캐서린 스워처는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기로 결심했다. 먼저 대학내 크로스 컨트리 팀에 들어가 마라톤 출전을 준비하려고 하는데 코치는 그녀가 치어리더가 되기 위해 팀에 들어온 줄 착각을 했다. 코치는 마라톤을 위한 훈련을 그녀가 견디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누구보다도 열심히 훈련하는 캐서린을 보고 정식 팀원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코치는 캐서린이 42.195km를 완주하면 대회 출전을 도와주겠다는 조건을 내걸었고 캐서린은 해냈다. 드디어 그녀는 20살때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하지만 완주를 눈 앞에 두고 여성인 것이 들통나 대회 관계자들이 레이스 중인 그녀를 강제로 끌어내려고 했다. 그 와중에 코치와 남자친구의 도움으로 그녀는 4시간20분의 기록으로 완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가명을 사용한 점을 이유로 공식 참가자로서 인정받지 못해 대회 주최측은 그녀의 완주 기록을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며칠 후 그녀가 대회 진행요원들에게 제지 당하는 모습이 담긴 사진이 공개되면서 수많은 여성들의 지지를 받았고, 결국 대회 주최측은 그녀의 기록을 인정한다는 발표를 하게 되었다. 세계 최초의 공식 여성 마라토너인 캐서린 스위처의 집념으로 인해 1971년 뉴욕 마라톤 대회에서 여성 참가를 허용하기 시작했고, 72년 보스톤 마라톤 대회에서는 여성 기록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그리고 그 이듬해 독일에서는 여성 전용 마라톤 대회가 열렸으며, 급기야 1984년 제23회  LA 올림픽에는 여성 마라톤이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다.

        세계 항공사의 영웅인 찰스 린드버그는 1927년 5월, “세인트 루이스의 정신”이란 이름의 프로펠러 비행기에 단독으로 몸을 싣고 뉴욕을 출발해 33시간 30분 뒤에 프랑스 파리에 도착함으로써 위대한 대기록을 세웠다. 그의 놀라운 기록이 세워진지 겨우 1년 뒤인 1928년 7월 3일, 31살의 늘씬한 한 여성이 대서양 횡단에 도전하는 한 비행기에 몸을 싣고 보스턴을 출발했다. 당시의 비행기의 성능으로는 대서양 횡단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다. 1919년 앨콕과 휘튼 브라운이 북대서양을 횡단한 이후 그때까지 총 6명만이 대서양 비행에 성공했고, 린드버그가 성공한 1927년 한 해에만 19명의 조종사가 대서양 횡단을 시도하다 목숨을 잃을 정도로 위험한 비행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한 여성이 도전을 한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린드버그처럼 조종사가 아니라 2명의 조종사 뒤편에서 승객으로서 타고가는 것이었지만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천신만고 끝에 비행기는 목적지에 도달했다. 그러나 비행이 끝나고 그녀가 느낀 것은 성취감이나 영웅심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기가 이 비행의 주역이 되지 못한데 대한 회한이었다. 그래서 거기서 만족하며 안주할 수 없었다. 어린시절부터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그녀는 간호원이 되어 1차 대전에 참전을 하게 되었는데, 캐나다의 토론토에 있는 병원에서 근무하던 중 병원에 위문 공연 온 곡예비행에 매료되어 비행의 꿈을 키워갔다. 간호원을 그만두고 임시 우편집배원으로 근무하다가 커티스 비행학교에서 최초의 여성조종사인 네타 스누크(Neta Snook)에게서 비행훈련을 받았고, 어머니의 도움으로 ‘The Yellow Pril’이라는 작은 경비행기를 마련해서 본격적인 비행경력을 쌓아나갔다.

        그녀의 이름은 아멜리아 에어하트, 1920년대 말 미국을 휘어잡은 당대의 여걸이었다. 에어하트가 비행의 꿈을 키우던 1920년대는 이제 막 항공 문화가 꽃을 피우는 시기였는데, 1928년 9월 그녀가 아버지를 방문하기 위해서 뉴욕을 출발해서 로스앤젤레스로 비행해 갔다가 다시 뉴욕으로 되돌아온 것이 최초의 미대륙 왕복횡단 비행기록이다. 그리고 첫 대서양 횡단때 아무 것도 못하고 뒷자리만을 지킨 후회와 미련을 극복하기 위해서 그녀는 다시 한 번 조종사로서 대서양 횡단 비행에 도전했다. 1932년 에어하트는 단독으로 대서양 횡단 비행에 성공해 언론의 찬사가 집중됐다. 그녀는 비록 세계일주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비행 중 실종되었지만, 생전에 교황을 알현했고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에게 초청을 받았으며, 여성 최초로 국립지리학회의 금장 메달을 받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그리고 15시간의 대서양 횡단비행을 통해 가장 빠른 대서양 횡단 비행, 여성 조종사로서 최초의 대서양 횡단 비행, 여성 혼자서 시도한 최초의 대서양 횡단 비행기록 등 세 개의 기록을 세워, 지금도 기네스북에 올라 있다.  물론 세계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남성들의 선구자적인 역할은 더 많았다. 이처럼 사회 곳곳에 산재해있는 유리 천장을 깨는 선구자적인 사람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들은 막막함을 뚫을 수 있는 용기와 내일을 위한 희망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주간 포커스는 이번호부터 128면으로 지면을 증면하고 신문 크기도 함께 키운다. 또, 독자들의 요청에 따라 신문부수도 500부를 추가 발행하기로 결정하면서, 콜로라도 한인 역사상 최다 지면과 부수를 자랑하는 신문의 역사를 새롭게 쓰게 된다. 주간 포커스 신문사는 지난 10년간 주간 신문 발행을 필두로 웹사이트, 전자신문, 라디오방송, 업소록, 문화센터를 소유함으로써 탄탄한 언론사의 모습을 굳건히 지켜왔다. 이와 더불어 창간 10주년을 맞는 올해부터 128면으로 지면을 늘리면서, 더욱 다양한 지역 뉴스와 알찬 정보를 담아 콜로라도의 한인 언론을 이끌어갈 것이다. 사실상 콜로라도의 한인 인구수와 한인업체수를 고려해볼 때 128면의 페이지는 상당히 많은 지면이다. 하지만 이는 높아져가는 콜로라도 교민들의 지적 수준에 발 맞추고, 당당하고 손색없는 한인 신문으로서의 새로운 역사를 쓰고자 포커스의 온 가족이 결정한 사안이다. 세상이 아무리 발전한다고 해도 우리 주변에는 금기의 벽들이 너무 많다. 그리고 도전하지 않은 벽들도 많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는 개척자의 역할을 해야한다. 앞으로도 주간 포커스는 정정당당하게 금기의 벽을 깨고, 콜로라도 한인사회에서 좋은 방향으로 ‘최초’의 역사를 128면에 가득 채워 나갈 계획이다. 포커스가 새로 쓰는 역사는 오늘도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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