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2차대전 당시 미국이 원자폭탄을 투하한 일본 히로시마(廣島)를 이번달 27일 방문하기로 했다. 미 대통령이 원폭 역사를 간직한 히로시마를 방문하는 것은 2차대전 종전후 71년만이며, 현직 대통령으로서의 방문은 처음이다. 하지만 오바마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은 자칫 일본인들에게 미국의 원폭 투하 행위에 대한 사과로 비춰질 수 있어, 각계각층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지난 10일 USA투데이는“일본인들은 오바마 대통령이 히로시마 원폭 투하에 대해 명쾌하게 사과할 것을 기대하지는 않지만 히로시마 방문 자체를 사과로 해석할 가능성이 크다”고 전했다. 미 외교전문지 디플로매트도 “일본에서는 그의 방문을 미 대통령이 원폭으로 인한 공포와 파괴를 인정하는 중요한 제스처로 받아들 것”이라고 전망했다. 앞서 미 사사카와 평화재단 연구원도 지난달 일본 산케이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대통령이 히로시마에서 연설하면 그의 발언이 잘못 해석되고 정치적 논쟁을 일으키며 과도하게 분석될 위험이 있다”며 오바마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을 우려했다. 벤 로즈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부보좌관도 허핑턴포스트에 기고를 통해 “원자폭탄 사용 결정에 대한 기본 입장은 변하지 않았다. 당시 관계자들의 대의는 정당했다”며 오바마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으로 인해 당시 미국의 선택이 정당성을 잃을까 염려했다. 한국 역시 오바마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의 의미를 놓고 큰 우려를 하고 있다. 그러나 백악관은 이러한 일각의 우려를 일축하고 있다. 조시 어니스트 백악관 대변인은 “오바마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을 과거 원폭 투하에 대한 사죄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원폭 사용 결정에 대해 다시 논의하려는 게 아니라 미래 비전을 제시하려는 것”이라고 밝혔다. 또 다른 미 정부 관계자 역시 ‘연설이 되건 성명이 되건 그 안에는 ‘오바마의 히로시마 방문이 일본의 전쟁 책임에 면죄부를 주는 것 아니냐’라는 질문에 “한국과 중국의 반발을 감안, 이번 방문이 ‘아시아 지역의 안정’에 기여해야 한다는 일본을 향한 메시지가 들어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취임 직후 체코의 프라하에서 “미국은 핵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주도적 역할을 할 도덕적 책임이 있다”며 핵 무기 군축, 핵 비확산, 핵 안보 강화를 제창했다. 이를 계기로 핵안보정상회의가 발족했고 오바마 대통령은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현재 임기가 8개월 정도 남은 오바마 대통령으로서는 ‘이란 핵 협상 타결’, ‘쿠바와의 국교 정상화’에 이어 히로시마 방문을 통한 ‘핵군축 확산’을 자신의 ‘3대 외교 업적’으로 자리매김하려는 집념이 강하다.

         하지만 오바마 대통령이 현 시점에서 국가간의 오해의 소지를 안고 강행하는 히로시마 방문은 일본에 가장 큰 피해를 입은 한국에게는 참 불편한 실정이다. 한국에 있어서 오바마의 히로시마 방문 결정은 두 가지 의미로 다가온다. 하나는 미·일 동맹의 강화를 보여준다는 점이고, 다음은 역사의 문제로, 제2차 세계대전 전범국이자 한반도 침략국인 일제의 국가 범죄에 대한 면죄부 효과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일제의 최대 피해자다. 역사 갈등이 한미일 공조 등 지역 협력의 장애물로 작용하는데, 그런 장애물을 더 키우는 듯한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 세계에서 핵무기의 참화를 겪은 곳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등 두 곳이다. 원폭 투하로 20만명 이상이 사망했고 한국인도 상당수 목숨을 잃었다. 미 대통령이 이를 위로하고 평화를 기원하는 것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원폭의 비극은 일본 제국주의가 일으킨 전쟁과 그들이 저지른 만행의 결과다. 태평양전쟁은 한국인 수십만명을 포함해 2천만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갔다. 일본은 전쟁을 극단까지 밀고 가다가 원폭을 불러들였고 원폭 투하 뒤에도 ‘결사항전’ 운운하는 광기를 부렸다. 당시 해리 트루먼 미 대통령의 원폭 투하 결단은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원폭 투하가 이뤄지지 않고 전쟁이 계속되었다면 수백만명이 더 희생되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일본은 자신들이 일으킨 전쟁에 대한 지속적이고 진정성 있는 사죄를 회피하고 있다. 아베 총리는 “전쟁에 대한 평가는 다를 수 있다”는 해괴한 말까지 했다. 이러한 아베의 뻔뻔한 발언은 미국의 묵인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 때문에 국제사회는 물론 미국 내부에서도 ‘전범국 일본’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희석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는 것은 당연하다. 한국·중국과 동남아 국가들은 가해자가 피해자로 둔갑하는 상황을 결코 용인할 수 없다. 오바마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에 대한 답례 차원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오는 11월 페루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 참석을 계기로 하와이 진주만을 방문하는 방안이 일본 정부에서 부상하고 있다. 일본 총리로는 처음인 진주만 방문이 성사되면 미일간 과거사 화해의 일대 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오바마 대통령과 아베의 방문과 답방으로 인해 일본과 미국과의 관계는 크게 진전될 것이다. 또, 미국의 대외정책에 있어서도 아베 정부가 추구하는 정책에 힘을 실어줄 것이다. 실제로 오바마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이 결정되면서 아베 내각의 지지율이 크게 상승했다. 오바마의 히로시마 방문을 성사시킨 것은 아베 정부의 엄연한 외교적 승리가 아닐 수 없다. 이는 한국 외교의 냉엄한 현실을 새삼 일깨워 주는 것이기도 하다.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과 일본이 밀착할수록 한반도를 둘러싼 긴장은 더 높아지고, 어려운 선택을 강요받는 우리의 딜레마는 커질 수 밖에 없다. 미국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핵무기를 사용한 나라이며, 일본은 유일한 피폭 국가이다. 두 나라의 정상이 인류 역사에서 결코 되풀이 되지 말아야할 비극을 되새기고 핵무기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다짐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하지만 한국을 포함한 전쟁 피해국을 고려하지 않은 이번 행보가 과거 일본측에 원폭 투하에 대한 사과의 뜻으로 받아들여져서도, 과거사를 외면하는 일본에게 면죄부를 주는 격이 되어서도 안된다. 아베는 오바마의 히로시마 방문으로 전범국의 이미지를 씻어낼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하지만 오바마 대통령은 태평양전쟁의 상징적 장소인 히로시마에서 일본의 전쟁 책임을 지적해 그 비극의 원인 제공자가 누구였으며 그 진짜 피해자는 누구인지를 분명히 하기를 바란다. 이제는 미국이 나서 일본의 피해자 행세에 확실하게 ‘선 긋기’를 해 주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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