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10여 년이 넘는 기자생활을 해오면서 나름대로 금기시 해왔던 내용들이 있다. 개인 사생활과 종교에 관한 것이었다. 공인 단체에 소속된 사람들을 질타한 적은 있었어도 평범한 사람들의 불륜사까지 챙길만한 이유는 없었다. 또 종교에 관한 얘기는 깊이 거론하다 보면 다른 종교를 가진 이들과의 갈등은 불 보듯 뻔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아왔다. 하지만 필자는 오늘 이 금기를 깨려 한다.

지난 몇 년 동안 급속하게 성장해온 한 교회가 요즘 내부진통을 겪고 있다. 처음에는 교회뿐 아니라 혈연으로 연결된 가정에서도 겪는 것이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지난 두 달 동안 얼핏 지나가는 이야기로 이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몇 번 듣긴 했지만 귀담아 들어본 적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교회의 성도 중 한 사람이 광고를 의뢰했다. 교회측으로부터 소환장을 받았고, 자신을 변호해 줄 변호인을 찾는다는 내용이었다. 내용이 다소 생소하긴 했지만 굳이 광고를 내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따지고 보면, 신문지면에는 이 보다 더한 광고가 수두룩하다. 허위광고와 비방광고, 잘못된 광고들 말이다. 그리고 광고를 싣고 안 싣고 하는 문제는 신문사 내부의 일이다. 개인적인 얄팍한 친분이 있다고 해서 신문사 내부의 일을 세세히 알리는 것은 신문사 체면에 먹칠하는 일이기도 하다.

일단 이 광고를 실었다. 교회 목사와 한 장로의 이름이 거론되긴 했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별다른 내용은 없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그 교회 소속의 한 장로가 신문사로 전화를 걸어 이 광고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광고 내용에 거론된 당사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무슨 대단한 사건을 신문에 낸 것처럼 수선스러웠다. 그리고는 왜 이런 내용을 미리 알리지 않았느냐고 했다. 어처구니 없는 질문이었다. 신문사에서 광고를 넣고 안 넣고를 왜 그 교회에, 그 사람에게 알려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른 신문사에서는 이 광고 건에 대해 자기한테 전화를 걸어 물어봤다고 했다. 어느 신문사인지 모르지만 이 말이 사실이라면 이 또한 한심한 언론사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여기까지는 화가 나서 따져 물을 수 있다고 치자, 자신의 광고를 당장 빼라고 신문사에 말하는 것은 광고로 신문사를 협박하는 것과 다름없다. 필자가 오늘 이 칼럼을 구구절절이 쓰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기사의 논조에 대해 독자가 건의나 의견조율을 요청하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신문사가 광고주의 뜻을 거슬렸으니 광고를 빼라는 말 하는 것은 나름 보복을 하겠다는 말이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보복성 멘트가 누구에게나 기분 좋을 리 없다. 특히 신문사에게는 말이다. 150달러짜리 광고 하나로 협박을 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이 전화통화로 인해 교회가 겪고 있는 진통이 단순한 갈등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동안 교회 일도 집안 일이라고 생각해서 흘려 들었던 이야기를 귀담아 듣게 된 계기도 이 전화통화 때문이었다.

어릴 적부터 불교 집안에서 자란 필자는 미국에 와서도 좀처럼 기독교에 대한 마음을 열지 못했다. 하지만 지역사회에서 대부분의 행사가 교회에서 열리다 보니, 비록 취재를 위한 일이지만, 교회에 가는 횟수가 늘고, 찬양을 듣는 것이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는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교회를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마음은 먹었는데 교회를 선택하는 일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난해부터 진통을 겪고 있는 이 교회에 마음이 끌리기 시작했었다. 주변에 유난히 이 교회에 다니는 성도들이 많았고, 이들은 서로를 칭찬하는데 아낌이 없었다. 좋은 사람들이 만나 믿음을 가지고, 이민생활에 든든한 영적 울타리를 만들어서 좋아했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랬던 사람들이 변했다. 좋은 사람들이 한 순간에 어색한 사이가 되었고, 자기 말만 하려는 사람들로 변해 버렸고, 신앙 선배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는 전도사가 아닌 지배계급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아무 목소리도 내지 않고 있다고 해서 각자 편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것도 오산이다. 자기 편이 아니면 정신 이상자로 만들어 버리고, 말 잘 듣는 성도만 있어도 교회의 모습은 유지할 수 있다는 판단으로 중생의 아픔을 더 이상 어루만지지 않고, 보듬지 않는다면 이게 무슨 교회인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일반 회사와 다름없다.

신문광고 문제도 해결하기 위해서는 순서가 있었다. 우선 교회 내에서 당사자들간에 합의하고, 필요하다면 신문사에 협박이 아니라 협조부탁을 해야 하는 것이 순서다. 갑자기 이런 간단한 일 처리에서도 자신과 의견이 다르면 강압적인 방법을 선택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교회 내에서 치리나 소환장 같은 무시무시한 단어들이 오가는 것도 이러한 처리방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어째서 북한에서나 언급되는, 말을 듣지 않는 사람들을 격리시키는 아오지 탄광행과 같은 처벌을 교회에서 입에 담는지 난감하다. 이번 일을 계기로 교회는 종교적 의미를 다시 한번 새겨봐야겠다. 이 또한 사랑으로 보듬고 용서하지 못한 책임부터 먼저 반성해야 할 일이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온 사람들도 자기 목소리만 내는데, 초보 신도들이 무엇을 보고 배울 수 있을런지.

처음에는 이런 생각을 했다.‘마음에 들지 않으면 교회를 바꾸면 되지 왜 저렇게 시끄러운 곳에 있는 것일까’하고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리만큼 현재 상황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조차도 일요 예배에 꼬박꼬박 참석하고 있었다. 이들은 전처럼 화합할 수 있고 바뀔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지난 몇 년 동안 사랑과 믿음의 씨앗을 뿌린 곳을 쉽게 등지고 싶지 않아 했다. 모두가 처음 교회를 개척했던 그 마음으로 조금만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지길 바란다. 그리고 헤어질 때 헤어지더라도 자신이 사랑했던 교회를 미워하지 않고 떠나게 되길 바란다.


<편집국장 김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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