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분은 종파의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사두개파, 바리새파도 아니었습니다. 힐렐파도, 샤마이파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당시의 종교가를 거리낌없이 욕했으니, 위선자, 회칠 한 무덤, 천국 문을 막아선 사람, 손가락하나 까딱하지 않는 사람…..등은 모든 종파의 사람들을 향한 욕이였습니다. 제사용 동물들은 내쫓고 환전 업무를 방해함으로 ‘성전중심주의’, ‘제사주의’의 종교를 정면으로 모독했습니다. 분봉왕 헤롯에게 ‘여우’라고 했으니 요즘말로 국가원수 모독의 언동을 했습니다.

외롭고 불쌍하신 주님

        그는 외교에 능하거나 적당히 넘어가는 기술이 없었습니다. 머리 둘 곳 없는 삶, 천하의 무숙자, 떠돌이, 무일푼, 무가족, 무국적의 외로운 사나이. 다른 일에는 늘 반목하던 세력들도 그 분을 박해하는 데는 합심했습니다. 열심당은 헤롯당과 합하고 사두개파는 바리새파와 짝하여 이 죄없는 젊은 문외한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사53:3, 8). 까마귀의 무리 속에서 백조 한 마리가 겪는 곤욕!!! 세상에 초월주의를 가진 자는 더러 있어도 예수님처럼 초월주의를 몸으로 실천하는 자는 없었습니다. 세상이 내 고을, 내 지방, 내 교파를 고수하는 한 거기에는 경쟁과 전쟁이 있을 뿐, ‘나’와 ‘내 것’이 완전히 없어져야 하늘나라가 임합니다. ….주의(主義)의 사람은 힘이 있지만 그는 ‘싸움의 사람’이요, 무아(無我)의 사람은 고독하지만 그는 ‘평화의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으로서 로마인과 싸운 것이 아니라, 무아의 사람으로서 …주의의 사람들과 싸웠고, 평화의 사람으로 투쟁의 사람들의 미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고독은 십자가 상에서 시편22편을 외칠 때의 외로움에 비기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무응답이실 때 인간의 고독은 극에 달하는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살려달라 울부짖는 소리 들리지도 않사옵니까? 나의 하나님, 온종일 불러봐도 대답하나 없으시고 밤새도록 외쳐도 모른체 하십니까? (공동번역) 예수님은 이 순간 온 천지간에 오직 한 점처럼 십자가에 외롭게 달려 계셨습니다. 그 분은 처절한 고독의 비명을 치면서 몸부림치셨습니다. 엔도슈사꾸의 <침묵>에 인간의 비극이 극에 달했느나 하나님의 ‘침묵’이 계속 띨 때, 아니 ‘하나님의 버리심’이 느껴질 때 인간의 그 지독한 허탈감과 고독, 절망이 블랙홀로 떨어지는 암담함을 예수님께서는 뼈가 저리게, 이가 시리게 맛보셨습니다.  그러나 오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믿음’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신앙의 성격’을 잘 보여주셨습니다. 욥은 일찍이 “주께서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주를 신뢰하리라”고 고백했거니와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셨다고 느끼는 순간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으셨습니다. 믿음이란 자기에게 유리하게 해 주실 때만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죽이실 때에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치 않는 것, 바로 그것이 믿음의 내용인 것입니다.

고독연습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보십시오! 그 분은 바리새인도 사두개인도 아니요, 로마인도, 유대인도 아닙니다.  그는 사람이십니다. ‘나’라는 것을 완전히 벗어난 사람입니다. 이제 인생의 고독의 해결점을 찾았습니다. 고독은 “내”가 있고 “내”가 살아 있을 때 옵니다. 예수님처럼 나와 나의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을 때 초연을 터득할 수 있고 고독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나는 매일 주고, 매일 산다”고 한 말씀과, “예수의 죽으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닌다”는 말씀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  낙향하여 40년간 고독수업을 했습니다. 고독을 배운 결과 인간적 자신감과 자만심이 세월의 흐름에 씻겨 나간 후 한, 정갈한 노인이 되어서야 비로서 호렙산의 하나님을 뵐 수 있었습니다. 욥은 “왜 의인이 고난 받아야 하는 가?”하는 질문에 광야에 홀로 앉아 고독수업을 끝낸 후 비로소 하나님을 만나 대환희, 대구원의 경지에 들어갑니다. 고독수업을 끝내기 전에는 하나님을 불러도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그러나 대환희에 들어가자 왜 고난이 임했던가? 하는 질문은 자연히 해소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그 환희 때문에 질문의 해답이 주어진 다기보다는 질문 자체가 없어집니다. ‘하나님 경험’의 환희가 압도적이어서 문제가 해결된다기 보다는 문제 자체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종종 고독을 주셔서 그가 인간과의 교제를 잠시 끊고 내면세계로 여행하면서 하나님의 손을 잡게 만드십니다. 그러므로 고독은 은혜의 기회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의로운 나무는 어째든 죽지 않는다면 강한 나무로 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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