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의 시대를 연 발명왕이자 제2차 산업혁명의 주역인 에디슨은 정규교육을 3개월밖에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평생동안 미국에서 1,093개의 특허를 받았고, 다른 나라에서 1,239개의 특허를 받았다. 양적인 면뿐만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도 에디슨의 발명은 중요하다. 그의 대표적인 발명품인 백열등, 축음기, 영화 등은 20세기 과학기술문명의 시대를 열어 주는 역할을 담당했다. 에디슨 하면, 달걀을 품었던 호기심 많았던 소년, 수습공에서 대기업 사장으로 자수성가한 사람, “천재는 99퍼센트의 노력과 1퍼센트의 영감”이라는 명언을 남긴 인물 등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이러한 에디슨에게 틀에 박힌 학교교육은 아무런 흥미를 부여하지 못했다. 에디슨은 수업 시간이 되면 선생님의 말씀은 듣지 않고 갖은 공상의 나래를 펴면서 노트에다 이상한 기계를 그리곤 했다. 에디슨의 학교 성적은 밑바닥을 헤맸고 에디슨은 말썽꾸러기 혹은 문제아로 낙인이 찍혔다. 학교 출석률은 점점 낮아졌고 결국 에디슨은 5년간 초등학교를 다니다가 열두 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말았다. 5년간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 에디슨이 초등학교에 출석한 기간은 도합 3개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에디슨이 다니던 학교는 질문이 금지되어 있었는데, 에디슨이 자꾸 질문을 하자 학교에서 쫓겨났다는 얘기도 있다. 어린 시절의 에디슨은 오늘날 교육심리학에서 말하는 ADHD(attention-deficient/hyperactivity disorder) 아동(주의력이 결핍되어 있고 과잉 행동을 하는 장애를 가진 아동)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교사들과 어른들의 눈에는 호기심이 왕성했지만 이상한 행동이 많았고 집단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으며 정서불안의 증세를 보였던 것으로 치부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정규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에디슨에게 가정교육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에디슨은 이해심 많은 어머니 덕에 자라면서 항상 실험을 할 수 있었다. 또 어릴 적에는 약 2300권의 책을 읽을 정도로 독서광이었으며, 보고 들은 것을 정리하고 요약한 수첩이 그가 사망한 후 4200여 개나 발견됐다.  

         상대성 이론을 발견한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어려서부터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지진아였다. 그는 학교 성적도 아주 나쁜 데다가 사교적인 성격이 아니었기에 학급에서 존재감이 없는 학생이었다. 어린 시절의 아인슈타인은 천재성이라곤 눈꼽 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학생이었다. 초등학교 생활기록부에서는 무엇을 하건 성공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적혀있을 정도로 열등생이었다. 그는 정말 어떻게 손을 써 볼 수 없는 꼴찌 학생이었지만 그가 훗날 천재를 능가하는 업적을 이루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아인슈타인은 1886년에 뮌헨의 루이트폴트 김나지움에 입학했다. 그는 수학과 과학 수업은 좋아했지만, 라틴어와 그리스어에는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게다가 그 학교는 엄격한 독일식 훈육을 표방하고 있어서 아인슈타인은 학교생활에 회의를 느꼈다. 병원에 가서 신경쇠약이라는 진단을 받은 후에 진단서를 휴학계와 함께 학교에 제출해 학교를 그만 두게 된다.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이탈리아로 이사를 갔다가 본인이 진학하고 싶어한 독일의 대학교에는 입학하지 못하고 스위스 취리히 연방공대에도 입학하려다가 낙방하고 재수를 하여 물리학과에 입학하였다. 대학에서도 고전 물리학에 염증을 느끼고 혼자서 공부하기를 즐겼다. 그의 꿈은 교사였는데, 결국 자리를 얻지 못했다. 이처럼 학교생활에 적응 못하고, 동시대의 교육방식에서 벗어나려 했던 아인슈타인이지만 지금 우리는 그를 천재라고 부른다. 1905년 빛이 에너지 덩어리로 구성되어 있다는 광양자설, 물질이 원자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는 브라운운동의 이론, 물리적 시공간에 대한 기존 입장을 완전히 뒤엎은 특수상대성이론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때 발표된 논문들은 단 8주만에 작성된 것이지만 그동안의 인식을 전환시킨 논문으로 평가되었다. 특히 특수상대성이론은 당시까지 지배적이었던 갈릴레이나 뉴턴의 역학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고, 종래의 시간과 공간 개념을 근본적으로 변혁시켰다. 몇 가지 뜻밖의 이론, 특히 질량과 에너지의 등가성(等價性)의 발견은 원자폭탄의 가능성을 예언한 것이었다. 영국의 유명한 윈스턴 처칠 수상도 학교 성적이 엉망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초등학교 시절 그는 학급에서 가장 성적이 나쁜 학생이었다. 그는 전 과목을 통해 골고루 성적이 불량했지만 특히 수학 성적이 나빴다. 그러던 그가 재무장관이 되어 영국의 재정을 책임졌으며 마침내 수상이 되어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주역 중의 한 사람이 되었을 뿐 아니라 저술가로도 활동해 노벨 문학상까지 탔다는 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 밖에 조선 후기의 시인 정수동, 르네상스 시대 미술의 대표적인 거장 레오나르도 다 빈치, 오스트리아 최고의 극작가 프란츠 그릴파르처도 어린 시절에는 엉뚱한 장난꾸러기 소년이었지만, 훗날 천재로 추앙받게 된 위인들이다. 아이들의 여름방학이 한창이다. 학교 다닐 때보다 학원 다니느라 더 바쁜 아이들도 있다. 그리고 남의 집 아이들보다 성적이 뒤떨어진다고 안절부절하고, 학교 가기 싫다는 아이에게 네가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라며 비뚤어진 아이들의 습관만 탓하는 부모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보지 못하는 부모에게도 있다. 방치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무한한 가능성을 믿고 주변에서 항상 지켜보는 버팀목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어린 시절에는 도저히 위인이 될 싹수라곤 찾아볼 수 없었던 예사롭지 않은 시절을 보낸 위인들이 적잖이 있다. 이들은 비록 엉뚱함으로 인해 사람들의 비웃음을 샀지만, 포기할 줄 모르는 ‘끈기’를 가지고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끈기를 이끈 부모가 있었다. 지금 빛나지 않는다고 다그치지 말고, 인내심을 가지고 아이의 장점을 믿고 지켜볼 수 있는 부모야말로 제 2의 에디슨과 아인슈타인을 탄생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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