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 조선(Hell朝鮮)은 대한민국의 인터넷 신조어입니다. 수년 전만해도 우리나라의 별칭이 다이나믹 코리아(Dynamic Korea)였는데, 지금은 누구나 헬 조선이라는 말을 씁니다. ‘한국이 지옥에 가깝고 전혀 희망이 없는 나라’라는 뜻으로 조국 청년들의 70%가 이 말에 동의한다고 합니다. 심지어 얼마 전 우리나라 정부고위관료는 국민을 ‘개, 돼지’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그럼 그는 개, 돼지가 낸 세금으로 먹고 산거지요. 헬 조선이 맞습니다. 이런 한국의 현실에 비추어 참 그리운 분이 있습니다. <바보새 함석헌>선생(1901-1989)입니다. ‘씨알의 소리’로 가난하고 억눌린 국민에게 희망을 외치던 분이죠. 정부고위관리가 ‘개, 돼지’로 칭한 국민을 그분은 ‘국민은 역사와 나라의 주체다, 국민 속에 살아 사는 힘이 하나님이시다’라며 ‘씨알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진리를 듣는 것이며 듣는 것과 함께 행동이 있어야 한다’고 설파했습니다.

         그 바보새가 남기신 詩(Psalm) 하나가 있습니다. “그대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 만 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 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이 찬성해도 ‘아니’라고 하는 그 한 얼굴 때문에 그 길을 가지 않게 되는 그 사람을 갖고 있습니까? 온 세상에 ‘아니’라 해도 ‘옳다’라고 하는 그 한 얼굴 때문에 그 길을 가게 되는그 사람을 나는 갖고 있습니까? ‘아니 와 옳다’는 나의 자유의지적 선택입니다. 자유의지는 창조주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소중한 축복입니다. 그러나 자유의지적 선택의 권리와 함께 책임도 나의 몫입니다. 권리가 큰 만큼 책임도 큰 것이지요. 그래서 천국과 지옥은 있습니다. 몇 년 전 자동 피아노를 본적이 있습니다. 단추를 누르면 건반이 저절로 움직이며 미리 입력된 멜로디를 반복 하더군요. 완벽한 연주입니다. 신기했습니다. 언뜻 악기가 생명을 지닌 듯 보였지만 그러나 사실은 생명이 없었습니다. 영감이 없습니다. 모든 소리가 프로그래밍 된 기계 장치에서 나올 뿐입니다. 그럴싸하지만 진짜 피아노는 아닙니다. 이런 피아노를 보며 생명으로 채우지 못하고 그저 기계적으로 맡겨진 의무만 반복하는 소외된 삶들이 떠오릅니다. 내 모습이 혹 이런 피아노와 같지는 않은지요?

         사랑의 하나님은 사람을 자동 피아노처럼 로봇으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로봇으로 만들어서 사람이 하나님의 프로그래밍대로만 산다면 이 세상은 하나님의 장난감에 불과하겠지요. 그런 곳에서는 탄식할 일도 없겠지만, 살아갈 이유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행복하겠습니까? 왜 선악과를 만들어서 따먹게 하고 죽게 하느냐구요? 선악과는 피조물인 사람의 한계입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 육지로 오르면 죽듯이, 피조물인 사람이 한계를 떠나면 죽습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두신 것이지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왜 따먹게 하셨나구요? 선택의 자유의지를 주신 것이 불만입니까? 로봇처럼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리고 그렇게 한계를 넘어 죽게 된 사람을 살리려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독생자까지 보내셔서 내 죄 값으로 대신 죽으시고 나를 살리신 하나님 사랑의 비밀! 그 분이 바로 그 한 얼굴입니다.  자기를 하찮게 여기는 것이 겸손인줄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이 경건의 모습인 양 착각하지 마십시오. 겸손은 결코 자기 비하가 아닙니다. 성경속의 <욥>을 보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믿는 만큼 그분도 나를 믿습니다. 그 믿음 안에서 다 할 수 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내가 한다’는 Candoism은 불신앙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Through Him who give me strength)가 믿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겸손하면서도 당당합니다. 나의 약점을 보면서 나는 너무 시시하고, 약하고, 병들고, 불안하고, 무가치하고, 절망스럽고, 죄가 많다고 되뇌지는 않습니까? 그런 자기파괴에 나를 맡기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품안에 나를 맡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자유의지를 가진 하나님의 위대한 피조물이지 자동 피아노가 아닙니다. 우리의 삶은 기계처럼 완벽하지는 않지만 영혼이 숨 쉽니다. 영혼이 숨 쉬는 사람은 결코 자기 존재감을 잃지 않습니다. 만약 두려움과 절망과 반감으로 더 가치를 찾을 수 없다면, 조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가득 찬 성경이 나를 읽게 하십시오. 그리고 나에게 말씀하실 때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마십시오.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Today, if you heare His voice, do not harden your hearts. 히4:7) 오늘 그대의 영혼은 어떻습니까? 하나님 사랑의 말씀을 들으시고 내 삶을 조율하십시오. 능력 있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받는 사람이 행동할 수 있습니다. 사랑받는 사람만이 존재감을 가지고 자기 모습 그대로 당당하게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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