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영어공부를 열심히 하는 사람들의 영어 실력은 절대적으로 문법과 독해, 어휘력 및 듣기 능력에 집중되어 있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듣기 능력은 현대적 영어실력 스펙에 가장 중요한 요소로 각인되고 있다. 영어교육과 관련하여 듣기 능력을 우선시하는 잘못된 인식은 한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만연되어 있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물론 소위 영어교육 전문가들 조차도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이것은 독해와 어휘력 및 듣기능력을 바탕으로 하는 영어실력의 한계를 정확히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법정통역으로 나갔다가 법원에서 만났던 A씨가 있다. A씨는 자녀를 키우면서 자녀와 관련된 여러 가지 문제로 한국계 변호사 B씨를 선임한 적이 있다고 한다. B씨는 한국말을 못하지만 잘 알아들을 수 있는 변호사다. 또한 A씨는 미국에서 오랫동안 살면서 영어는 못하지만 영어를 상당히 알아들을 수 있는 분이다. 그런데 A씨와 B씨는 서로 의사소통을 하는데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A씨는 한국말로 하고, B씨는 영어로 말하면서 서로 대화를 나누는데 문제가 없었다는 것이다.   결국, 손님은 한국말로만 말하고, 변호사는 영어로만 말하면서도 어렵지 않게 대화를 나누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손님의 영어 듣기 능력과 변호사의 한국어 듣기 능력으로 ‘한가지말하기’가 아닌 ‘각자말하기’를 통한 대화가 가능했던 것이다. 얼핏 웃음을 머금게 하는 에피소드이다.   그렇지만 그와 같은 에피소드는 이민자들의 가족에게는 흔히 있는 일이기도 하다. 미국에서 태어난 한국계 2세들 가운데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2세들은 많지 않다. 그렇지만 그 2세들은 무리없이 부모님과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고 의사소통을 한다. 부모는 한국말로 하고, 자녀는 영어로 말하는 ‘각자말하기’ 방법으로 통하는 것이다. 물론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부모와 자녀들의 상대 언어에 대한 어휘력과 듣기 능력의 수준에 제약을 받는다.

         이와 같이 ‘각자말하기’는 듣기능력의 한계를 입증해주는 현실적 사례이다. 평소 한 마디 한 마디의 말을 입으로 반복하여 배우기를 소홀히하고, 이해 중심의 듣기능력에 만족하는 방법의 결과적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듣기 능력의 한계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현실적인 증거를 한국에서 보고 듣는 것은 쉽지 않다. 오히려 토익 또는 토플의 고득점 전략으로 듣기 능력에 집중하여 스펙을 높이고 취직을 잘하는 성공적(?) 사례들만 보고 듣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고사하고 대부분의 영어교육 전문가들조차도 듣기 중심의 심각한 폐해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그처럼 듣기 능력에 집중하여 쏟아붇는 똑같은 시간에 말배우기에 집중하면 듣기는 물론 말하기까지 포함된 영어의 모든 영역을 습득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한국인들이 영어공부에 매진하여 아무리 듣기 능력을 정복한다고 해도, 그 분명한 끝은 ‘각자말하기’ 뿐이다. 따라서 영어 듣기를 그렇게 열심히 해서 영어권의 사람을 만났을 때 한국말만 불쑥불쑥 튀어나오고 영어가 나오지 않는 것은 하나도 잘못된 현상이 아니다. 학습자의 어학적 감각이 부족해서 그런 것도 아니다. 어휘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도 아니다. 문장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문법적 기초가 부족해서 그런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결과의 현상인 것이다. 말배우기 없이 듣기에 집중한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발생되는 과학적 현상인 것이다.  말배우기 없는 듣기 능력의 한계는 이처럼 분명하다. 듣기는 되는데 말하기가 되지 않는다고 해서 계속 듣기에 집중하는 것은 잘못된 처방이다. 마치 피아노곡을 들을 수는 있는데 연주를 할 수 없다고 해서 계속 피아노곡 듣기에 집중하는 격이다.   영어습득도 분명 과학적으로 접근될 수 있다. 영어습득 및 영어 구사 능력의 수준은 분명히 산술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얼마나 실용적인 말을, 얼마나 많이, 얼마나 유창하게 배우고 익혀서 갖고 있느냐, 라는 기준이 바로 영어습득 및 영어 구사 능력 평가에 대한 과학적이며 산술적인 접근의 토대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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