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래 봬도 우리는 뼈대 있는 집안이다, 이 묘는 조선시대 고위관료였던 조상님의 것이다, 아들아, 대통령이 되었으면 한다, 대학교수보다는 나라의 녹을 먹는 것이 낫다.” 누구나 어릴 적에 이런 말을 집안 어른들께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모두 출세와 관련된 말이다. 뭐라도 한자리 해야만 된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이 출세욕이 나쁜 걸까. 그렇지만도 않다. 이 출세욕이야 말로 한국을 만든 원동력이었고, 지금의 한인사회가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이었다. 그러면 왜 출세욕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일까.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은 정치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부터 정계에 진출하면 출세를 한 것이라 생각해 장원급제를 하기 바랬고, 반대세력은 과감히 제거하기도 했다. 이런 한국 사회의 성향은 이민사회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한국 정계에 이름 한자 올리고 싶어하는 사람들과 이민사회에서 단체장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비슷한 맥락으로 풀이할 수 있다. 감투라도 한 가지 가지고 있어야 커피 한 잔이라도 얻어 마시고, 사람들이 자신을 찾아준다는 생각부터 비슷하다. 가끔 단체장이 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들을 보면 그 열정이 부러울 때도 있다. 한인사회를 바꾸고 싶고 발전 시키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른다. 하지만 자신이 공인임을 망각하면서부터 단체장의 자리가 한낱 개인의 욕심을 채우는 자리로 전락해서 문제다.

최근 LA 에서는 차기 한인회장 선출로 동네가 시끄럽다. 지역 언론뿐 아니라 한국의 언론에서도 코미디 선거라면서 대대적인 보도를 하고 있다. 현직 한인회장인 스칼렛 엄씨가 불출마를 약속하면서 박요한 한미동포재단 이사 등 몇몇 인사가 출마를 저울질하다가, 엄 회장이 마음을 바꿔 결국 ‘엄 대 박’의 대결 구도가 되는가 싶더니, 결국 선관위의 박 후보 자격 박탈에 이은 엄 후보 당선 공고 강행으로 투표 절차도 없이 허무하게 끝나버렸기 때문이다.

이번 선거의 모든 규정은 스칼렛 엄 회장이 재출마를 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 이뤄졌다. 선관위의 구성부터가 그랬다. 선관위원장은 현직 한인회 부회장으로 엄회장과 친분이 두텁고, 선관위원 9명도 소위 스칼렛 엄의 사람들로만 이뤄졌다. 그런데 엄 회장이 느닷없이 재출마를 선언하면서 선거 관리가 누가 봐도 불공정하게 진행됐다. 마치 운동선수가 경기에 출전하면서 자기 편 선수를 심판으로 임명한 꼴이다. 일반인들조차‘어이없다’는 반응이다. 결국 미주한인사회 최대 규모의 LA 한인회장 선거는 선거관리규정의 모호한 조항과 한인회장의 선관위원 임명, 선관위의 선거관리능력 부족 등으로 정통성에 치명타를 입었다. 급기야 한인회 해체 주장까지 제기되고 있다.

사태를 지켜보면서 필자는 스칼렛 엄씨가 덴버에서 회장을 했으면 저런 수모를 겪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우리의 선관위를 돌이켜보면 현 회장 측근, 혹은 그 측근의 주변인물로 구성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이것저것 흠 잡아서 선관위 마음대로 후보자격을 박탈시키고 공탁금만 챙긴 전적도 있다. 선관위가 하는 일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이 선관위가 된 적도 더러 있다. 이에 비하면 LA선관위 구성은 오히려 양반이다. 말도 안 되는 선거 관행에 익숙해져 있는 콜로라도에서는 이런 일이 그다지 이슈거리가 아니다.

하지만 대도시의 반응은 달랐다. 전 LA한인회장이었던 남문기씨 또한 공식 기자회견을 통해 이의를 제기하며 선관위 결정에 반대표를 던졌고, 각계 각층, 언론도 합세해서 따져 묻고 있다. 이를 보면서 갑자기 씁쓸하면서도 부러웠다. 이 곳 한인사회에서는 저렇게 따져 묻는 단체장들과 언론이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만약 LA에서 잘못된 회장 선거를 바로잡기에 성공한다면 한인회가 한인사회 대표기관으로서 확고히 자리를 잡을 것이고, 실패한다면 인정받지 못하는 한인회의 모습으로 명맥만 유지하게 될 것이다. 콜로라도의 한인회 또한 이 과정에 실패했기 때문에 동포들에게 외면 받는 단체로 전락했다.

한인회뿐만이 아니다. 미주 한인사회에서 한인회 다음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단체가 바로 재미 대한 체육회이다. 물론 이 협회 또한 콜로라도에서 단체로서의 의미를 상실한 지 오래이다. 매년 선수들이 전국 체전에 출전할 때마다 격려는 커녕 쓸데없는 회칙을 운운하면서 출전을 방해하고, 급기야 개막식에서 선수들은 협회기조차 없이 입장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하지만 지난 2월말, 20여 년 만에 새 회장이 선출되면서 새로운 체육회의 출범에 희망을 품었다. 그런데 석 달이 지나도록 취임식도 못하고 있었다. 속내를 들여다보니 이렇다. 정상적으로 총회를 통해 투표로 회장을 선출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당신들이 뽑은 회장을 인정할 수 없다면서 회장 선출을 번복하려는 움직임이 보인다. 새 회장을 뽑았음에도 불구하고 별 다른 이유 없이 결과를 번복해, 기존의 회장 자리를 절대로 내 놓을 수 없다니 이건 무슨 경우인지 이해가 안 된다. 여하튼 이런 내부적인 불협화음으로 인해 그 동안 인수인계를 차일피일 미뤄왔다. 하지만 다행히도 신임회장이 결단을 내려 새 집행부를 구성하고, 이번달 말에 취임식을 한다는 소식이다. 체육회는 대외적인 행사를 많이 하는 단체이다. 더 이상 콜로라도 젊은이들을 케케 묵은 회칙으로 묶어두고 어른 공경 따위나 따지면서 대외적으로 망신 당하는 협회가 되지 않길 바란다.

단체장은 협회가 한인사회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선된 임무이다. 어느 단체이든 간에, 단체장과 그 몇몇의 측근 때문에 그 협회가 무용지물이 되었다면 그에 대한 책임을 질 줄 알아야만‘출세욕’이라는 단어가 단순한‘개인욕심’으로 치부되지 않을 것이다.


<편집국장 김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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