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안다고 하는 일은 원래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더욱이 자기 자신을 바로 안다는 것은 더더욱 어렵습니다. 여기에 한가지를 더하면 자기 자신에게 진실하기란 어려운 일 중에 어려운 일일것입니다. 세상에 강한 사람도 많고, 위대한 사람이 많지만 자신을 아는 일과 자신에게 진실하는 일, 이 두 가지를 할 수 있다면 그는 진정 위대한 사람이요, 참으로 강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남에게 실망하고 남을 믿지 못하는 것은 사실은 자기를 믿지 못하기에 남도 믿지 못하고 실망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실망하지 않는 사람은 남에게도 실망하지 않습니다. 모처럼 진실된 나를 찾고 보니, 무엇인가를 좀 아는 줄 알았는데 이제 와보니 아는 것이 없습니다. 무엇인가 좀 이루어놓은 줄 알았는데 이룬 것이 없습니다. 조금은 의로운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불의한 것을 이제야 알게 되고, 남보다 나은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평균수준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오히려 나약하기 짝이 없는 자신을 바로 볼 때 자신에게 실망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처럼 되찾은 진실입니다. 실망할 것이 없습니다. 비로소 나의 본래 모습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에 전혀 다른 성격의 두 인물이 나타납니다. 한 사람은 죄인으로 낙인 찍힌 여인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이 여인은 거리출신의 여인이요, 일곱 귀신이 들렸던 여자입니다. 또 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시몬이란 사람입니다. 이 사람의 별명은‘바리새인’입니다. 그‘바리새’라는 말은‘구별한다’또는‘성별한다’라는 뜻입니다. 남보다 더 깨끗하게 종교생활을 하며, 남보다 더 온전하게 하나님의 율법을 지킨다고 해서‘바리새’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입니다. 어느날 이‘바리새’시몬이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고 대접을 하게 됩니다. 이 잔치에 죄인인 막달라 마리아가 불청객으로 들어옵니다. 향유를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발 밑에 서서 울면서 그 눈물로 발을 적시며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씻기고 입맞추고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습니다. 보통 이것은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헌신의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허나 집주인, 시몬은 처음 문간에서부터 말리고 싶었는데 어쩌다가 들어왔고, 예수님께서는 그녀를 받아 들이시며 영접해 주시므로 감히 나가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혼자 중얼거렸습니다.“내가 모신 이 분이 정말로 선지자이시면 이 여자가 얼마나 더러운 여자인줄을 아실 것이고 또 아셨으면 물리치실 것이다.”이때 예수님은 그의 생각을 아시고는“시몬아! 내가 네게 할 말이 있다”하시고는 시몬을 부르십니다.“네, 선생님 말씀하소서”하며 무슨 이야기인가 하고 귀를 기울였습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들어서 말씀하십니다.“여기 빚진 자가 둘이 있는데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빚 졌고, 또 한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두 사람 다 갚을 길이 없다. 그래서 빚을 주었던 사람이 모두다 탕감하여 주었는데 두 사람 중 어느 누가 주인을 더 사랑하겠느냐?”어허, 이거 대단한 책망이 아닙니까? “네가 이 여인을 업신여기지만 너도 이 여자와 마찬가지 죄인이다. 네 생각에는 이 여인보다는 조금은 의롭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빚지기는 매양 마찬가지이다.”즉 갚을 수 없는 입장은 꼭 같다고 책망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상대적 관계와 절대적 관계를 혼돈하며 삽니다. 상대적으로 보면 바리새인이 조금은 나을 것입니다. 이렇게 남보다 조금 착하다는 것 때문에 정말로 중요하게 여겨야 할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모습, 자기 존재를 우리는 상실하고 맙니다. 남보다 조금은 낫다고 하는 상대적 모습에 신경을 쓰다 보니 마침내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인된 진짜모습을 잊어 버리게 됩니다. 시몬은 이 여인과의 상대적 비교에서 자신의 죄인된 모습을 잃어 버렸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 앞에서 “나”라고 하는 존재가 얼마나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자인가를 잊고 있었더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너도 지금 빚진 죄인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니 더 중요한 사실은 이 여자가 더 많은 빚을 졌기에 이 여자가 주님을 더욱 더 사랑하느니라. 어거스틴은 이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단 두 가지형의 죄인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자기가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과 또 하나는‘자기가 의인이라고 착각하는 죄인’입니다. 둘 다 죄인은 마찬가지인데‘깊이 생각하는 죄인’과 ‘착각하는 죄인’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진실한 고백이 있습니다. 바르게 살려 했더니 위선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나님을 찾아 다니다가 그만 우상을 섬기고 말았습니다. 깨끗하게 산다고 했으나 게으른 사람이 되었고, 불신앙의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의를 생각한다고 했더니 교만한 옹고집이 되어 아집투성이의 인간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진실을 말한다면,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명예, 힘, 지식, 능력, 재산 그 무엇을 내어 놓아도 하나님 앞에서 의(義)를 이룰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근본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실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내 놓을 것은 과거에도 없었고, 현재에도 없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스스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월 지나고 나이 들면 갚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맙시다. 다시 한번 더 속지않으려면 자기부정에 인색하지 말아야 합니다. 깨끗이 나의 의를 부정하고, 무효로 돌릴 때, 죄인의 선한 행실은 공로가 될 수 없음을 알아차릴 때, 이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 내랴”“원하는 선은 행하지 못하고 원치 않는 죄만 짓는도다”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될 수 있습니다. 오직 은혜로만 구원의 길이 있습니다. 갚을 것이 없는 자에게 책망한다고, 기다린다고 되겠습니까? 주인이 탕감해 주십니다. 주인편에서 즉, 하나님편에서 희생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기희생의 표식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하나님께서 대신 그 빚을 탕감해 주셨습니다. 모두다 탕감되었습니다. 이것이‘복음(Good News)입니다.’예수님께서 십자가로 값을 지불해 주셨습니다. 유일한 소망, 유일한 가능성은 여기에 있습니다. 갚을 길이 없는 나에게 주인이 탕감해 주셨으니 할 말이 없습니다.“이 일에 대하여 무슨 말하리요”죄인의 괴수를 불러서 구원하셨으니 할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할말이 없고, 사도가 되었으니 더욱 할 말이 없습니다. 한발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난을 당하는 일까지 있으니, 할 말이 더욱 없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구원 받은 사람들은 이런 노래 속에서 살아갑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찾았네” 회개와 감사는 병행합니다. 회개의 깊이와 은혜의 높이는 항상 함께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나의 나 됨과 나의 무능을 시인하면 할수록 더욱 감사와 헌신하는 생활은 빛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 빛을 발하는 자의 삶으로 이 년말년시를 살아가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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