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트 콜린스 전 시장의 자서전 중에서

<지난호에 이어>
2005년 4월에 나는 고아원에다 내 기록을 요청했다. 6개월 후인 10월에 나는 내 입양 기록이 모두 담긴 큰 봉투 하나를 받았다. 그러나 내 생물학적 부모와 관련된 기록은 모두 삭제된 상태였다. 그런데 그중 종이 한장의 상단 구석에 고아원 직원이 깜빡 잊고 지우지 않은 내 생모의 이름이 있었다. 그 이름을 시작으로 내 생모에 대한 조사는 급물살을 탔고, 11월 2일 나는 내 생모일지도 모르는 여성에게 전화를 걸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나는 생각했다. ‘좋아. 나이가 많으실 테니 겁을 주지 않도록 주의해야겠다. 평온한 삶을 뒤흔들어놓고 싶지는 않으니까 말야. 하지만 무슨 말로 시작해야 하지?’

어머니가 전화를 받았다.
나는 “글로리아 퀸타나라는 분을 찾고 있습니다. 그분이 맞습니까?”라고 입을 열었다. 나는 그분에게 샌 루이스 지역에서 태어났는지를 물었고 그분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나는 내 가족을 찾고 있다며 내가 그랜드 정션에서 태어났으며, 친모가 친권을 포기하면서 고아원으로 보내졌다고 말했다. 이 말을 하자 그분은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오기가 생긴 나는 다시 전화를 걸었고 다시 그분은 전화를 끊었다. 나는, ‘어라, 이분도 고집이 대단한데? 정말 내 친어머니가 맞나보다’라고 생각하며 다시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가 전화를 받자, “글로리아, 레이입니다. 전화를 끊지 마세요. 저는 제 인생을 돌아보았습니다. 고아원에서 제 양부모에게 입양이 되고, 구두닦이 소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시장이 되겠다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저는 시장의 구두를 닦으면서 언젠가 나도 저런 구두를 신겠다고 되뇌이곤 했습니다.” 어머니는 조용히 듣고 계셨다. 그런 후 어머니는 “네 번호가 있으니 너와의 관계를 지속하고 싶으면 전화를 걸겠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어머니에게 어머니를 귀찮게 하지 않을 것이며, 전화를 걸어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러나 그것이 몇 년이 걸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내 휴대전화가 울렸다.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엄마다. 아들아, 나는 네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려주어야 할 것 같아서 전화를 했다. 내 아들이니까 너에게도 그걸 알 권리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어머니는 스무살 무렵에 강간을 당해 나를 낳았다고 말씀하셨다. 아이는 낳았는데 기를 능력은 안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결국 친권 포기 각서를 썼다고 하셨다. 30여분을 얘기한 후 어머니는 나를 만나고 싶다고 하셨다. 우리는 월요일 아침 9시 30분에 아이합(IHOP)에서 만나기로 했다. 나는 9시에 가서 어머니를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미리 가서 어머니가 들어오시는 모습부터 하나도 빠지지 않고 보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월요일 아침 9시에 레스토랑에 들어갔을 때 이미 어머니가 와 계셨다. 어머니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셨던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 보았고, 우리가 가족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우리는 힘껏 껴안았다. 그리고 어머니는 내가 친부와 닮지 않아서 다행이라며 웃으셨다. 나도 어머니를 공격한 남자와 닮았으면 어쩔까 걱정이 되었었는데, 어머니의 말을 들으니 안심이 되었다.

우리는 오랫동안 아침식사를 하며 지나간 이야기를 했다. 어머니는 처음에 내가 전화를 했을 때 겁을 먹고 바로 전화를 끊은 이유에 대해 설명하셨다. “난산 끝에 아이를 낳았고, 친권 포기 각서를 쓴 후 의사에게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아기를 안아볼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어. 그런데 의사가 이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아이가 죽었다는 거야. 그래서 나는 수십년동안 네가 죽은 줄로만 알았어.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편으로는 네가 어디에선가 살아있을 것만 같다는 느낌을 항상 받아왔다는 거야. 아무런 증거도 없는데 말이지.”  우리가 그날 레스토랑을 떠날 때, 우리는 다시 한번 더 포옹을 했다. 그리고 나는 어머니에게 말했다. “갑자기 든 생각인데요. 어머니는 저를 다시 한번더 안아 보기 위해 54년을 기다리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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