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도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종교재판을 받으셨고, 빌라도 총독 앞에서 형사재판을 받으셨습니다. 재판정에서는 피의자를 향한 심문이 이루어지고, 피의자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변론을 합니다. 예수님을 심문했던 사람들은 공회의 의장격인 대제사장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두 가지를 질문합니다. 먼저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마가복음 14:60)고 묻습니다. 여기서 ‘이 사람들’은 공회가 예수를 죽이기 위해 세운 거짓 증인들입니다. 이 질문을 받으신 예수님은 ‘침묵’하시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에게 절대 불리한 증언에 대해 입을 다무셨습니다. 두 번째로 대제사장은 ‘네가 그리스도냐?’(마가복음 14:61)라고 질문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그리고 너무나도 분명하게 ‘내가 그니라’라고,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답변하셨습니다. 빌라도 총독 역시 두 가지 질문을 예수님께 던집니다. 먼저는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마가복음 15:2)고 묻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 역시 너무도 명확하게 ‘네 말이 옳도다’라고, 자신이 ‘왕’이라고 답변하셨습니다. 이어지는 빌라도의 두 번째 질문은 이렇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를 고발하는지 아느냐?’(마가복음 15:4) 빌라도의 이 질문의 의미는 ‘너를 이 법정에 세운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공회의원들의 고발에 대해 네 자신을 변호해 보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다시 아무 말씀으로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마가복음 15:5)였습니다.

       예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자신에 대한 마지막 방어권과 변론권을 포기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태도에 대해 마가복음을 기록한 마가는 예수님의 재판에 대해 이런 아주 인상 깊은 기록을 남기며 마무리합니다. ‘빌라도가 놀랍게 여기더라’(마가복음 15:5) 자신을 변론해야 할 순간에 ‘침묵’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빌라도가 놀랐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묻는 질문에 대해서는 ‘내가 그리스도다!’ ‘내가 왕이다.’라고 너무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고발하고, 폭력을 행사하고, 거짓 증언하는 하는 사람들의 증언에 대해서는 ‘침묵’하셨습니다. 대게 재판을 받는 사람이 재판정에서 침묵하는 경우는 자신의 답변으로 인하여 자신에게 불리해 지거나, 자신의 가족 또는 주변 사람들이 불이익을 당할 소지가 있을 때 진술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집니다. 이것을 법정용어로 ‘묵비권’ 행사라고 합니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자신을 변호하고 방어하고 변명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침묵하는 것은 정말 바보 같은 짓입니다. 이 재판은 그저 재판관의 질문 몇 마디에 답변하고 징역 몇 년 언도받는 형사재판이 아닙니다. 재판관의 질문에 대해 자기 방어를 위한 답변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목숨, 즉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재판입니다. 그런대도 예수님은 생명 보존을 위한 자기 방어권을 스스로 포기하시고 침묵하셨습니다. 그래서 빌라도가 놀랐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의 침묵은 어떤 침묵이었기에.... 예수님의 침묵은 어쩌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유익을 포기하는 침묵일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자신에 대하여 묻는 질문에는 ‘내가 그리스도다.’ ‘내가 유대인의 왕이다.’라고 당당하게 대답하셨습니다. 왜입니까? 오늘 우리들의 구원 때문입니다. 이 예수님의 신분이 부인되면 오늘 우리의 구원도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이라는 세상 사람들의 이 큰 유익을 위해서는 기꺼이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비난과 폭력과 고발과 거짓 증언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는 입을 여셨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는 입을 닫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전혀 반대로 살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변호해 주는 일에는 인색하면서도, 자신의 유익을 위해 나를 변호하고, 나를 방어하는 일에는 말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로 우리 주변은 넘쳐납니다. 자기의 정당성을 확인받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의 눈에는 침묵을 지키시는 예수님이 바보처럼 보일 것입니다. 자기의 입장을 떳떳하게 밝힌다고 해서 그 사람이 꼭 현명한 것은 아닙니다. 밝히는 지혜보다 침묵하는 지혜가 더 수준 높은 도덕일 때가 있습니다. 자기 방어와 자기변명에 조급한 사람은 예수님을 닮을 수 없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비난이 사실이라면 변명할 필요가 없고, 만일 비난이 허위라면 더구나 변명할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져야한다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알기에, 그 뜻 앞에 순종하시기 위해 침묵하셨습니다. 어찌 살고 싶지 않겠습니까? 빌라도 앞에서 조금만 자기변명을 하시면 무죄 판결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침묵하셨습니다. 재판장인 빌라도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예수님의 태도가 너무나 이상했습니다. 살기 위해 자기 방어를 하지 않는 피의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이러한 태도는 이상함을 넘어 빌라도를 놀라게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만 침묵하신 것이 아닙니다. 아들에게 십자가를 지우시는 아빠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도 침묵하십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들 예수님께서 ‘아빠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셨지만, 아들의 그 절절한 부탁을 듣고서도 아빠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골고다 언덕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숨을 헐떡이시며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절규하시는 아들의 그 마지막 외침에 대해서도 여전히 침묵하셨습니다. 왜요?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셔서 그랬습니다. 사랑하시기에 침묵하시는 ‘아빠 아버지’의 마음에 기꺼이 동참하시기 위해 우리 주님께서도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사’(요한복음 3:16)의 표현입니다. 정말 사랑하면 말이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말없이 십자가 지고 골고다로 올라가셨고, 말없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셨습니다. 침묵은 참 불편합니다. 나를 변명하고 방어하기 위해 입을 열어야 할 때 침묵하고 있으면 손해 보는 것 같습니다. 답답합니다. 그러나 ‘침묵은 말보다 위대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아는 속담에도 ‘웅변은 은이고 침묵은 금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시대의 위대한 기독교 작가요 설교가 중에 한 사람인 리차드 포스터 목사님은 ‘침묵의 한복판에 주님이 계신다.’고 했습니다. 주님 만나시기를 원하십니까? 침묵의 한 복판으로 들어 가시를 바랍니다. 침묵하시는 주님의 ‘침묵의 영성’을 배우고 훈련하시기를 바랍니다. 말을 해야 할 때와 입을 닫고 침묵해야 할 때를 잘 알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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