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남편과 함께 응급실에 갔었다. 응급실에서 6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환자로 들어간 남편보다 필자가 더욱 초췌해져 있었다. 응급실 병실은 기껏해야 환자 한 명과 보호자 두어 명 정도 들어갈 수 있는 좁은 공간이다. 그런데 그 좁은 방에 창문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한동안 잊고 살았던 필자의 공포증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일종의 폐쇄 공포증이다. 다행히 남편은 심각한 병세가 아니어서 당일 바로 퇴원을 했지만 필자의 심리 상태는 좀처럼 안정되지 않았다. 어느새 10월의 중순에 접어들었다. 올해도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작년과 비교해 크게 발전한 것이 없다는 허망함까지 밀려왔다. 그래서 그런지 병원을 다녀온 뒤부터 뉴스에 나오는 정치, 경제 등 시사적인 얘기가 도통 귀에 들어오질 않았다. 북한이 어떻고, 트럼프가 어떻고, 문재인 대통령이 어떻고 하는 이야기에 전과 같이 신경을 집중시킬 수가 없었다. 세계 여러 나라 대통령들이 하는 일들을 여기서 아무리 떠들어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무력감도 동반됐다. 한 발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런 부정적인 감정들에 대해 특단의 조치가 필요해 보였다.  네델란드의 후기 인상파 화가인 빈센트 반 고흐는 발랄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그림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는 유독 노란색에 집착했다. 누런 밀짚모자를 즐겨 썼으며 불타오를 듯 선명한 색감의 해바라기 정물화를 자주 그렸다. 노란 저택에 머물면서 ‘옐로 하우스’라는 이름도 붙였다. 훗날 의학계에서는 흔들리듯 불안한 붓 터치와 노란색에 대한 선호는 ‘측두엽 간질’의 증상일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리고 자신의 귀를 잘라 여인에게 선물할 정도로 광인(狂人)이었던 그는 술과 마약에 의존하면서 결국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1994년 게임이론으로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존 내쉬(John Nash)는 강박증세에 가까운 정신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 게임이론 자체는 응용 수학의 한 분야로 발전되었고 지금은 미시경제학에서 필수 불가결한 분석 도구로 자리 잡고 있다. 이 이론은 특성상 꼬리의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추론의 연쇄가 필요한 개념인데, 연구의 성향 때문인지 그는 MIT 교수를 사직한 후 죽을 때까지 정신병원에서 30여 년을 고통 받았다.

          미국의 대문호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일가는 4대가 우울증과 정신질환에 시달렸다. 헤밍웨이에게 사냥과 낚시 등을 가르쳐 줬던 의사 아버지는 1928년 엽총으로 자살했다. 헤밍웨이 자신도 말년으로 갈수록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 망상에 시달렸다. 아버지의 자살을 원망하면서 역설적이게도 아버지와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집에서 엽총으로 머리를 쏴 자살했다. <노인과 바다>, <무기여 잘 있거라> 등 전투적이고 남성적인 소설을 남긴 것은 남성성에 대한 강박적인 집착과 나르시시즘의 영향이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평가받는다. 또, 73세의 나이에 “늙고 추한 것을 견딜 수 없다”며 자살한 <설국>의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결벽증과 나르시시즘이 있었으며, 도박벽과 우울증이 있었던 러시아 문호 도스토옙스키는 죄와 벌 등 거의 모든 작품에 자신의 살인 충동을 투영했다. 영화 ‘Shine’의 실존 인물인 데이비드 헬프갓 역시 정신질환으로 고통 받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메이저 콘서트에서 악마의 교향곡이라는 라흐마니노프 3번을 완벽하게 연주하면서 음악적으로 큰 성취감을 얻게 되지만 계속된 가족과의 관계 단절로 극심한 신경쇠약에 시달리면서 끝내는 고향 호주로 돌아가 정신병원에서 혼란과 격리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 이 사람들은 후세에 천재라고 평가받지만 한결같이 우울증과 강박증에 시달려 평생을 보낸 불행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이룩한 외적 업적은 높이 살만하지만 자신에 대한 내적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일에는 실패한 것이다.  초등학교 여름방학 때였던 것 같다. 바닷가에 수영을 하러 갔던 나는 늘 오빠의 장난 대상이었다. 모래사장 위 흩어지는 파도 거품의 끝자락에 발을 담그고 앉아있던 나는 오빠의 손에 이끌려 바다로 나갔다. 까만색의 커다란 고무 튜브에 매달려 한참을 바다로 나갔는데, 장난끼가 발동한 오빠는 수영을 할 수 있는 경계선인 하얀 스티로폼 공에 나를 앉혀 두고 튜브를 끌고 가버렸다. 발이 닫지도 않는 바다에 그렇게 한참을 있고 난 뒤부터는 물이 무서워졌다. 그런 후 바다는 바라보는 대상이었지 뛰어들어 놀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수영을 못해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변수가 필자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수영강습을 시작했다. 하지만 수영은 취미활동이 아닌 공포의 대상이었다. 머리를 물 속에 넣는 것이 죽을 것 같이 무서웠다. 그래도 물에 대한 공포감을 견디며 자유영·평영·배영까지 마스터했다. 내 아이들이 위험에 처하게 될 만약을 상상하면서 그 무서움에 친숙해지기로 한 것이다. 한 때 고소공포증도 있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일부러 패러글라이딩에 집착하면서 공포감을 즐기며 높이의 벽을 상상하는 아찔함도 감수했다. 그리고 우울증도 왔었다. 첫 아이를 낳고 알 수 없는 심리적 공황상태에 잠깐 휩싸인 적이 있었다. 사람들은 산후 우울증이라고 했다. 옛말 그대로 시간이 약이었다. 가족의 사랑 그리고 스스로의 여유로움을 찾고 난 뒤에는 우울증이 사라졌다.

          지난 주말 응급실에서는 한동안 잊고 있었던 폐쇄공포증의 기억이 살아났다. 이 두려움은 오래전 이집트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생겼다. 아주 편안하게 저녁식사를 즐기고 있었는데 갑자기 기체가 심하게 흔들리면서 식판 위에 올려져 있던 음식이 날아가고, 산소 마스크가 내려지고, 비상등이 켜지고, 실내등이 꺼지면서 비행기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승무원도 머리를 숙이고 주의방송 조차도 하기 힘든 상황이 되었다. 밀폐된 공간에서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죽어야 한다는 생각이 밀려오면서 극심한 정신적 패닉 상태에 빠진 적이 있었다. 그 이후 비행기, 지하철, 버스를 타는 것이 두려워졌다. 할 수 없이 차를 하나 뽑았다. 내가 쉴 수 있을 때 쉬고, 내릴 수 있을 때 내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면서 이 증상은 다 나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0여년 전 엘리베이터에 두어번 갇히면서 또다시 증상이 나타났고 극심한 심리적 불안감을 겪은 적이 있다. 그래서 찾은 곳이 스키장이었다. 탁 트인 콜로라도 산 정상에서 즐길 수 있는 스키가 필자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치료약이 되어 주었다. 이렇게 내 마음대로 주정차를 하기 위해 자가용을 구입하고, 공간의 제약이 없는 넓디넓은 곳에서 스키를 즐기며 폐쇄공포증을 극복해 왔는데, 이번에는 어떤 방법을 찾아야 하는 걸까.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울증 혹은 다양한 정신질환을 경험한 적이 더러 있을 것이다. 특히 아이들을 성장시키고 난 뒤 허탈한 주부들, 직장을 잃은 남편들, 갱년기 아주머니들,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수험생들은 강박 증세를 동반한 우울증을 경험하는 대표적인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필자의 주변에는 자녀들이 떠나고, 남편은 늦게 귀가하면서 홀로 남은 자신을 한탄하며 점점 우울증에 빠진 갱년기 주부들이 비일비재하다. 결혼과 출산으로 인해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뭔가를 하고 싶어도 나이가 들어버려 더욱 우울하다는 게 우리 주부들의 평범한 수다가 된 지 오래다. 다행스럽게도 골프와 댄스, 요리, 노래, 그림 등으로 극복한 사례들이 늘고 있다. 그러나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 생활을 찾지 못한 사람들은 가을이 깊어질수록 이런 수다에 한숨이 더해진다. 비관도 깊어진다. 하지만 가을에 고독할 수 있다는 것은 감성이 살아 있다는 방증이다. 이 또한 즐겨보자. 필자도 자신을 사랑해주고,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들과 함께 한다면 창문 없는 조그마한 다락방에 갇혀 있어도 폐쇄공포증 따위는 잊어버릴 수 있을 것 같다. 바람이 더 차가워지기 전에 사랑하는 사람들과 오손도손 차 한잔을 마시며 소박한 동화라도 써 보는 건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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