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은 복음적으로, 신학은 진보적으로!"

    126년의 역사를 지닌, 전통과 경건함을 존중하면서 동시에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것으로 유명한 아일리프 신학 대학(Iliff School of Theology)에 한국 출신 이보영 목사가 작년 7월 학장으로 취임했다. 전 미국과 캐나다를 통틀어서 최초의 여성이자, 최초의 아시아인 학장이 배출된 것이다. 그녀는 2007년 UC버클리가 세운 서부에서 가장 오래된 신학대학원인 퍼시픽 스쿨 오브 릴리전(Pacific School of Religion) 에서 종신교수로 임명되었었는데, 이 역시도 최초의 유색인종 종신교수라는 기록이었다. “왜 나인지 모르겠어요!" 이 대단한 성과를 이룬 비결에 대한 이보영 목사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학교 측이 적합한 사람을 찾기 위해 여러 루트를 통해 요청한 결과 본인의 이름이 가장 많이 추천되었던 결과라는 설명을 들려주었다. 그 배경은 1991년 미국에 와서 박사 학위를 따고 목사 안수를 받은 뒤 목회자이자 교수로서, 성경의 이름으로 불의마저도 정당화되기도 하는 백인 중심의 신학을 바꾸고, 여성, 가난한 사람들, 이민자들, 그리고 소수인종의 입장에서 성서를 읽고 권익을 높이던 활동들이 알려졌던 때문이 아닐까라고 덧붙였다. 
 
    대학에서 기독교 교육과 영성을 가르치고, 종신교수에 이어 학장에까지 오른 대단한 인텔리전트인 이보영 목사가 이렇게 가장 낮은 곳, 소외된 곳을 찾아 다니게 된 계기는 연세대에 입학하면서부터라고 한다. 고등학교 때까지 해병대에 근무하셨던 아버님 덕분에 포항에서 아주 예쁜, 서양식으로 지어진 집에서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대학에 가보니 교과서에서 배웠던 것과 너무나 다른 세상을 보게 되면서 가치관이 완전히 흔들렸단다. 전두환 독재정권 시절이던 1983년 당시, 그 동안 듣고 배웠던 것들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에 눈을 뜨게 되자 사회 정의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단다. 그래서 물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가난한 동네였던 청량리, 신림동과 남영나이론 등의 공장을 찾아다니며, 부모의 가난으로 공장에 다닐 수 밖에 없던 아이들, 노동자, 파출부 등 가난하고 소외받은 사람들을 만났단다. 그동안 너무 많이 누리고 살았던 것들을 돌려주고 싶었다고 했다. 연세대에서 석사를 마치고 나자 학교에서는 박사를 권유했지만, 삶을 너무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본인만 엘리트의 길을 가는 것도 옳은 것 같지 않아 목회의 길에 들어섰다. 당시 연세대 해직교수였던 이개준 목사님과 함께 신반포 감리교회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의사, 변호사, 교수, 언론인 등 물질적으로 사회적으로도 많이 가진 사람들을 위한 목회도 함께 이어가게 되었다. 당시 교회 건물을 소유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우고 신자 교육에 예산의 30%를 쓰면서 평신도를 육성시켰다고 한다. 그 결과 30년이 넘은 지금은 평신도 중심으로 돌아가는, 작지만 알찬 교회가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씨앗 뿌리기는 이보영 목사가 미국에 오면서 더 넓은 곳으로 확장되었다. 박사를 하면서 드디어 목사 안수까지 받았단다. 목사가 되겠다는 부르심은 열세 살 때의 체험에서 비롯되었는데, 여느 일요일 아침처럼 부모님을 따라 교회를 갔다가 깊이 기도를 하게 되었단다. 알고 있던 사람 하나하나를 다 떠올리면서 기도하고 나중에는 나라를 위한 기도까지 하면서 완전히 몰입하게 되었었단다. 기도를 마치고 고개를 들자 사방은 아무도 없는 고요함 자체였고, 교회 밖으로 나오니 온갖 나무들, 나뭇잎 하나하나, 풀 포기 하나하나가 인간의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생생한 살아 있음으로 다가왔단다. 그리고‘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만드셨다’는 것을 몸으로 체감하며 흘러나오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고 한다. 이 일을 계기로 신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목회자로 부르신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었단다. 

    첫 목회지는 120년의 전통을 지닌 백인 교회였고, 이곳에서도 백인이 아닌 목사가 부임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단다. 그녀는 지적이면서도 영성적인 설교를 했고, 청소부에서부터 의사, 교수까지 다양한 직업의 신자들이 원하고, 필요로 하는 다양한 영적인 프로그램들을 제공했다고 한다.  안수를 원하는 신자에게는 안수도 해주고, 말 한마디 안 하면서도 내면 깊이 들어가는 독특한 예배 프로그램을 시도하기도 하고, 교회 전체 신자들을 방문하고, 함께 밥을 먹는 행사도 많이 열면서 마음으로 소통하는 노력을 했단다. 이런 노력이 쌓이면서 신자들은 밤 10시만 되면 그녀가 자신들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4년이 지나자 출석하는 교인들이 세 배가 늘어나게 되었단다.  백인들의 텃세와 무시는 그녀에게도 당연히 일어나는 일이었지만, 목사의 직분이 돌봄뿐 아니라 가르침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언제나 새로운 교육의기회로 여기며 다가갔단다. 이때에도 당연히 평신도, 어린이, 청소년을 위한 교육에 공을 들였고, 신자들이 목사에 의존하지 않고 교회의 주인이 되도록 도왔다고 한다. 이보영 목사는 스스로에 대해 ‘신앙은 복음적이며, 신학은 진보적’이라고 표현했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선다는 것은 나 한 사람으로서만 바른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 위해 기독교 입장에서 시민운동에 나서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 한 사람이 복 받고 잘 되는 것에 대한 관심을 뛰어 넘어 다른 이들을 돌보며 나의 문제로 여길 때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올 수 있다고 하다. 그녀의 삶에서 보듯 천국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이루어 나가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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