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살면 살수록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정치력’인 것을 새삼 실감한다. 우리 기성 세대들은 한국에서 격동의 민주화 시대를 겪었으며, 정치인들의 부정부패를 눈감아주는 약육강식의 시대에 살다 와서 그런지 정치에 대한 염증이 심하다. 그래서 선뜻 정치에 개입하지 않고 숨 죽이며 조용히 살고 싶어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강력한 힘이 정치에 있다는 것, 결코 정치를 벗어나서는 국가와 국민, 모두 그 어떠한 발전도 이룩할 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제는 ‘외면’보다는 ‘참여’를 선택하는 편이 현명한 태도임을 알아야 한다.  지난 주는 남가주 한인들의 저력이 빛났던 한 주였다. LA 한인사회는 결집된 힘으로 한인타운 주민의회의 분리안을 부결시켰다. 이번 주민투표는 미국 내에서 가장 큰 한인 공동체 지구인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한인타운을 쪼개 방글라데시 타운(리틀 방글라데시)을 조성하기 위한 투표였다. 지난 2월 방글라데시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현 윌셔센터·코리아타운 주민의회 관할 구역을 5가를 경계로 해서 둘로 나누고 북쪽 구역을 리틀 방글라데시 주민의회로 신설·독립시켜 달라는 신청서를 지난 LA시에 제출하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하지만 주민투표 개표 결과 반대표가 무려 98.5%에 달해 투표에 참여한 한인들 모두가 놀랐을 정도로 압도적 승리로 끝이 났다. 투표에 참여한 전체 유권자가 대략 1만9천여 명이었으니 최소 1만8천명 이상의 한인들이 한 표를 행사했다는 얘기가 된다. 노인들을 비롯한 많은 한인들이 뙤약볕 밑에서 4시간이상 줄을 선 채 투표 차례를 기다렸고 주류언론들은 밤늦게까지 투표소 앞에 장사진을 친 광경을 보도하기도 했다. 주민투표가 실시되기 한달 전만 해도 한인들의 관심과 참여가 저조해 우려가 컸다. 현지에 거주하면서 이번 캠페인의 자원봉사자로 활동한 지인에 따르면, LA 한인회와 한미연합회 등 한인 단체들이 주축이 되어 ‘한인타운 주민의회 구역 축소 반대 운동 모임’을 위한 가두 캠페인을 LA 한인타운 전역의 쇼핑몰과 마켓 등 앞에서 펼쳤다고 한다. 하지만 관심과 참여가 저조해 표결 결과에 반영될 한인들의 투표수가 현저히 부족한 실정이었다. 당시 LA시 선거국의 발표에 따르면 지난달 18일까지 접수된 한인들의 우편투표 신청은 1,200여건에 불과했었다. 그러나 우편투표 마감 시한을 2주일 여 앞두고 한인타운이 나눠지는 것을 막기 위한 노력이 전방위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메모리얼데이 연휴 동안 LA지역의 주요 한인 교회들에서는 교인들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주민의회 분리 저지를 위한 투표 등록 캠페인이 펼쳐 수 천명이 등록할 수 있었다. 이처럼 한인 단체들과 교계가 모두 나서서 한인 타운이 두동강 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 결국 커뮤니티의 응집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주민의회는 지역주민들의 의견과 요구사항을 적극 반영시키기 위해 창설된 시스템으로 시장과 시의회에 이어 LA시 행정을 책임지는 정부 역할을 하는 중요한 기구다. 주민의회는 시정부의 모든 정책 결정을 사전 통보 받고, 시 예산 편성시 선취권을 요구하는 권한을 가지며 자체 운영 예산권을 행사하는 등 커뮤니티 현안 및 시정책과 관련해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다. 현재 LA시 전역에는 윌셔-센터 코리아타운 주민의회를 포함해 96개의 주민의회가 있으며, 해당 지역의 부동산 개발 계획이나 부지사용, 용도 승인에서부터 관할 구역 내 비즈니스 업소의 영업시간 연장 등에 이르기까지 거주민들과 업주들에게 직접적이고 실질적으로 미칠 수 있는 사안들의 승인 여부를 1차적으로 결정해 시의회에 전달할 만큼 큰 권한을 갖다. 이런 이유로, 한인타운의 주민의회가 축소되는 것은 한인타운의 비즈니스에 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비교적 짧은 기간 저지 캠페인이 벌어졌음에도 한인들은 전례 없는 참여로 뭉쳤다. 이번 저지 캠페인에 한인들이 뜨겁게 호응한 데는 한인타운 노숙자 쉘터 건립 논란을 통해 맛 본 좌절과 분노가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정치적 힘과 행동 없이는 스스로의 권리를 지킬 수 없다는 자각이 수많은 한인들을 투표장으로 이끌어냈을 것이다. 일각에서 이번 분리안 저지 성공은 계층과 세대를 초월해 모든 한인들이 한마음으로 이뤄낸 ‘정치혁명’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와 같은 성공의 경험이 일회성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앞으로도 한인커뮤니티 미래와 관련한 다양한 이슈들은 계속 터져 나올 것이다. 그때마다 빠짐없는 투표 참여를 통해 우리의 목소리를 확실하게 내야 한다.

    현재 주민 의견 수렴 절차를 제대로 거치지 않은 채 LA 한인타운 지역 내 노숙사 쉘터 건립 계획이 강행되고 있다. 한인 커뮤니티의 반발이 거세지자 시의회는 다른 부지를 알아본다고 달래 놓고서는 정작 두 곳의 대안 부지들은 기존보다 더 한인타운 복판의 주택가에 위치한 것으로 드러나 커뮤니티의 반발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한인사회가 한인타운 중심에 노숙사 쉘터 설립 추진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한국의 한 언론이 ‘노숙인도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었냐’ 면서 ‘LA 한인들이 한국식 님비를 벌이다 된서리를 맞았다’고 보도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노숙자와 관련된 몇 명이 한인사회를 지탄하는 피켓을 들고 있다고 해서 한인사회가‘된서리를 맞았다’는 표현은 옳지 않다고 본다. 한인사회의 비즈니스와 한인타운의 존립, 그리고 한인타운의 이미지는 노숙자들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말인가.

    한인타운에는 한인 비즈니스들이 집중적으로 모여있다. 어느 국가를 가든 차이나타운은 관광 명소로서 여행자들이 먹거리로, 볼거리로 꼭 들러보는 곳으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되었다. 때문에 차이나타운과 마찬가지로 관광지로 역할을 해야 하는 한인타운에 노숙자 쉘터가 들어서는 것을 반대하는 이유가 개개인의 생계 유지와 집값 폭락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 물론 생계와 집값도 중요한 문제이지만 말이다. 노숙자 쉘터를 한인타운에 설치하는 것이 노숙인 문제에 대한 최상의 해결책은 될 수 없다. 일 안하고, 먹고, 놀고, 구걸해도 정부가 잠잘 곳을 만들어주니 노숙자는 계속 늘어나는 것이다. 차라리 변두리 쪽에 공장과 함께 근로의 대가를 치를 수 있는 기숙사형 직업훈련소를 설립하는 게 해결책이 될 수 있다. LA 한인타운은 한인들의 이민 역사가 고스란히 묻어 있을 뿐 아니라, 미국내에서도 가장 큰 한인타운으로서의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타운이 두 개로 나눠지는 것은 이미 막았고, 타운 중심지에 노숙자 쉘터가 들어서는 일 또한 미주 한인 전체들이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일이다.

    사실 LA 한인들이 압도적 표차로 타운 분리안을 저지한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인사회의 정치적 승리일 뿐 아니라 향후 한인타운을 분할하려는 그 어떤 시도도 고개를 들지 못하도록 쐐기를 박는 효과도 있었다. 하지만 가장 큰 의미는 정치적 참여가 가져다 주는 긍정적 결과를 몸소 체험하고 확인하는 기회가 됐다는 사실이다. 이번 LA 한인타운의 문제는 한인사회의 단체들과 교회 그리고 커뮤니티 전체가 단합해 이끈 결과이다. 주류사회와 연관된 난제들은 콜로라도 한인사회에서도 생길 수 있다. 지금까지도 여럿 있었다. 한국전 참전용사비 및 공원 건립건, 오로라 한인타운 지정건, 덴버-인천간 직항노선 개설건, 한국어 운전면허 시험 시행건, 합법적 정치인 후원회 설립건 등이 여기에 포함될 것 같다. 현재 두 개의 한인회가 있다고 하지만, 지금처럼 모였다는 기념사진 한장만 남기는 활동에 그치는 수준이라면, 만약 콜로라도 한인사회가 LA와 같은 문제에 맞닥뜨리게 되었을 때, 어느 단체의 누구를 중심으로 일을 풀어나가야 할 지에 대한 고민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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