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의 친구 S목사님은 댈러스에서 목회를 한 적이 있습니다. 약 5년 전에 댈러스의 C교회의 청빙을 받고 부임했습니다. 매주일 20여분의 성도님들이 출석했습니다. S목사님은 부임하자마자 새벽예배를 시작했습니다. 목사님 부부만이라도 새벽예배를 드리겠다는 각오로 시작했습니다.첫 새벽예배에 15분의 성도님들이 참석했습니다. 성경 한 장을 읽고 강해하는 설교를 했습니다. 다들 좋아했습니다. 예배가 끝나면 도넛 가게에서 도넛과 커피를 나누었습니다. 가끔 맥도날드에 가기도 했습니다.

    새벽예배를 시작한 지 3개월쯤 되었을 때 십일조헌금(수입의 10%를 헌금하는 것)에 대한 설교를 했습니다. Y장로님의 부인인 Y집사님이 설교 도중에 자리를 떠났습니다. 교인들은 급해서 화장실에 간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Y집사님이 집으로 바로 가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Y집사님은 연말에 장로(여자 장로를 인정하는 교단)가 되고 싶으셨습니다. S목사님은 십일조헌금을 하시는 분이어야 장로 후보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하셨습니다. Y집사님은 신약시대에 십일조 헌금을 강조하는 목사님은 이단성이 있는 목회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성도님들에게 목사님에 대한 험담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S목사님은 부임한 지 5개월 만에 사임을 하고 시카고로 이사했습니다. 그 곳에서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지금은 70여분의 성도님들이 출석하는 화기애애한 교회를 담임하고 계십니다. C교회는 담임목사 청빙광고를 냈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서류를 냈습니다. Y장로님을 중심으로 청빙위원회가 구성되었습니다. Y장로님은 목사님과 인터뷰를 할 때마다 십일조헌금에 대해 질문을 하셨습니다. 모든 목사님들이 다 십일조를 강조하셨습니다. 결국 청빙하는 일이 지연되었습니다.

    C교회의 성도님들이 하나 둘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는 Y장로님 가족만 남게 되었습니다. Y장로님은 C교회의 문을 닫았습니다. 섭섭한 마음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이번 기회에 큰 교회에서 장로로 섬기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Y장로님은 댈러스에서 큰 교회인 B교회에 출석했습니다. 담임목사님은 반갑게 맞이하셨습니다. 목사님은 Y장로님에게 “C교회에서 장로님으로 섬기셨으니 장로님으로 호칭하겠습니다. 그러나 시무장로님이 되시려면 새 가족 반 성경공부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최소한 3년 이상 출석해야 시무장로 후보자격이 주어집니다. 힘드시겠지만 같이 신앙생활을 하십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Y장로님은 은근히 기분이 나빴습니다. 그는 작은 교회인 P교회로 옮겼습니다. P교회 담임목사님도 반갑게 맞이하셨습니다. 담임목사님은 “작은 교회이지만 그래도 교회 나름대로 정관이 있습니다. 시무장로님이 되시려면 최소한 1년이 지나야 합니다. 그리고 4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시무장로 후보가 될 수 있습니다. 공식예배 80% 이상 출석, 1년에 성경 일독, 1년에 1명 이상 전도 그리고 십일조 헌금을 하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Y장로님은 B교회보다 P교회가 더 기분이 나빴습니다. Y장로님은 한국교회가 아닌 미국교회로 옮겼습니다. 미국교회도 아주 반갑게 맞이했습니다. 다른 한인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으니 마음이 편했습니다. 찬양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다만 영어 설교를 이해할 수 없어 조금 지루했습니다. 미국교회는 등록하라고 강요(?)하지 않으니 참 편했습니다. 그러나 2개월이 지나도 등록하라고 권하지 않으니 은근히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하루는 등록에 대해서 질문을 했습니다. 담당자가 아주 기뻐하면서 등록서류를 내놓았습니다.

     서류에 매주 얼마의 헌금을 할 것인지를 서약하는 난이 있었습니다. Y장로님은 한인교회나 미국교회나 모두 다 썩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교회에 출석하지 않고 TV 또는‘유튜브’의 설교를 듣고 헌금이나 선교비는 우편으로 수표를 보내고 있습니다. 사업이 잘 될 때에는 헌금을 조금 많이 하고 사업이 어려울 때는 조금했습니다. 가끔 빼먹을 때도 있었습니다. 요즈음 점점 빼먹는 횟수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Y장로님은 한국의 명문대학교인 S대학을 다니셨습니다. 미국에 유학을 오셨습니다. 박사학위를 받고 한국으로 돌아가서 교수가 되고 싶었습니다. 학비가 부족하다보니 일하면서 공부했습니다. 점점 박사학위가 멀어졌습니다. 구두수선 가게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면서 수선하는 기술을 배웠습니다. 나중에는 아예 구두 수선가게를 인수했습니다. 지금은 알부자라고 소문이 났습니다.

    그러나 늘 만족함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직업의 귀천이 없다고 하지만 은근히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한국의 동창들은 대부분 대학교 교수 아니면 정부의 고위 공무원들이었습니다. 한국에 나갈 때마다 동창들을 만나는 일이 기쁘기도 하지만 언제나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그나마 교회에서는 장로님으로 대우를 받았습니다. 십일조는 못하지만 그래도 다른 분들보다 많은 헌금을 하고 있다는 것이 뿌듯했습니다.

    전에는 식당이나 마켓에서 한인들을 만날 때 알아보는 사람도 많았고 인사하러 일부러 오는 분들도 있었는데 지금은 알아보는 사람들도 적고 일부러 인사하러 오는 분도 줄어들었습니다. 만날 때마다 S대학교 졸업한 것을 간접적으로 자랑하면서 자긍심을 누렸는데 지금은 자랑을 들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장로님이라 불러주는 사람들도 줄었습니다.

    요즈음 은근히 S목사님이 야속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합니다. 목회가 어렵더라도 조금 견디지 그걸 못 참고 사임하다니........ 성도의 신앙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 목사가 기도하고 가르치고 성숙한 성도가 되도록 양육해야지........ 목자가 양들을 버리고 떠나면 되느냐고 푸념을 한다고 친구 목사님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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